1월 2일 탄생화
새해의 소란스러움이 채 가시지 않은 1월 2일. 달력의 숫자는 '시작'을 말하지만, 창밖의 계절은 여전히 깊은 겨울의 한복판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차가운 계절의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오늘의 탄생화, 노랑수선화를 생각합니다.
수선화는 참 묘한 꽃입니다. 화려한 장미처럼 뜨겁지도 않고, 안개꽃처럼 수줍지도 않습니다. 그저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차가운 공기를 향해 자신의 향기를 쏘아 올릴 뿐이죠. 그 고결한 자존감 때문일까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독을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 꽃을 사랑했습니다.
고독한 구름이 만난 황금빛 들판 – 워즈워스의 수선화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문턱 사이, 노랑수선화는 늘 가장 먼저 빛을 드러내는 꽃입니다. 1월 2일의 탄생화로 지정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얼어붙은 땅 위에서 가장 먼저 고개를 드는 이 꽃은, 새해라는 시간의 시작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이미 추사 김정희가 그린 수선화가 동양의 고독과 절제를 품은 상징이었다면, 서양에서의 수선화는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유명한 시, “I Wandered Lonely as a Cloud”입니다.
이 시는 흔히 ‘The Daffodils(수선화들)’라는 부제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에게 수선화는 단순한 봄꽃이 아니라, 마음속 풍경이자 위안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이 시가 있습니다.
노랑수선화는 학명 Narcissus pseudonarcissus(나르키수스 슈도나르키수스)로, 수선화속(屬)에 속하는 구근식물입니다. 원산지는 유럽, 특히 영국과 서유럽 지역이며, 봄이 시작될 무렵 들판과 숲 가장자리에서 군락으로 피어납니다. 영국의 시골 풍경에서 노란 수선화는 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수선화의 전설은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Narcissus)에서 비롯됩니다. 자신의 모습에 반해 연못에서 떠나지 못하다가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여기서 ‘자기애’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노랑수선화는 시간이 흐르며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희망, 재생, 새로운 시작, 기쁨. 특히 영국 문화권에서 수선화는 우울한 겨울을 밀어내는 빛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1802년 봄, 워즈워스는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잉글랜드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부는 호숫가, 언덕 아래 펼쳐진 들판에 수천 송이의 노랑수선화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그 장면을 본 순간의 감동을 도로시는 일기에 남겼습니다.
“호숫가에 수선화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며 물결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짧은 기록이, 두 해 뒤 워즈워스의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정신을 치유하는 존재로 보았던 워즈워스에게, 이 수선화들은 하나의 ‘영혼의 풍경’이 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
워즈워스의 수선화는 혼자 쓰인 시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윌리엄 워즈워스의 「I Wandered Lonely as a Cloud」를 한 시인의 영감으로만 생각하시지만, 이 시의 출발점에는 여동생 도로시 워즈워스의 시선이 함께 있습니다. 도로시는 시인은 아니었지만, 자연을 바라보는 감각이 매우 섬세한 일기 작가였습니다.
1802년 봄, 두 남매는 잉글랜드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함께 산책하시다가 호숫가에 가득 핀 노란 수선화를 만납니다. 도로시는 그날의 풍경을 일기에 남기며, 바람에 흔들리며 춤추는 수선화들과 물결처럼 이어진 꽃들의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워즈워스는 이 일기를 읽고, 그 장면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시 길러내셨고, 두 해 뒤 그 기억은 「I Wandered Lonely as a Cloud」라는 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수선화는 한 사람의 영감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쳐 만들어진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로시의 눈이 자연을 기록하고, 워즈워스의 마음이 그것을 시로 피워 올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시 속의 수선화는 더 이상 혼자 피어 있는 꽃이 아닙니다. 그 황금빛 들판은, 함께 걷고 함께 바라본 두 오누이의 조용한 동행이 남긴 풍경으로 느껴집니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나는 구름처럼 외로이 떠돌고 있었다.
골짜기와 언덕 위를 떠다니는 한 조각 구름처럼.
그때 문득 눈앞에 나타난 것은
황금빛 수선화들의 무리였다.
호숫가, 나무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춤추고 있었다.
워즈워스는 자신을 ‘외로운 구름’에 비유합니다. 이는 도시와 사회로부터 떨어져 자연 속을 떠도는 시인의 고독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수선화들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생명의 군무처럼 보입니다.
Continuous as the stars that shine
And twinkle on the milky way,
They stretched in never-ending line
Along the margin of a bay:
Ten thousand saw I at a glance,
Tossing their heads in sprightly dance.
은하수의 별들처럼 끝없이 이어진
그 노란 꽃들은
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펼쳐져 있었고
한눈에 수만 송이가
고개를 흔들며 경쾌하게 춤추고 있었다.
여기서 수선화는 우주의 별과 같은 존재로 격상됩니다. 땅 위의 꽃이 하늘의 별과 같은 질서를 가진 존재로 묘사되는 순간, 자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로 변합니다.
The waves beside them danced; but they
Out-did the sparkling waves in glee:
A poet could not but be gay,
In such a jocund company:
I gazed—and gazed—but little thought
What wealth the show to me had brought:
호수의 물결도 함께 춤추고 있었지만
수선화들은 그보다 더 기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즐거운 벗들 속에서
시인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지만
이 장면이 내게 어떤 부를 안겨줄지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워즈워스가 말하는 ‘부(wealth)’는 돈이 아니라 기억입니다. 자연의 한 장면이 인간의 마음속에 남겨주는 정서적 자산, 그것이 진짜 부라는 뜻입니다.
For oft, when on my couch I lie
In vacant or in pensive mood,
They flash upon that inward eye
Which is the bliss of solitude;
And then my heart with pleasure fills,
And dances with the daffodils.
훗날 내가 침대에 누워
멍하니 혹은 생각에 잠길 때
그 수선화들이
내 마음의 눈앞에 번쩍 떠오르고,
그 고독의 행복 속에서
내 마음은 다시 기쁨으로 차올라
수선화들과 함께 춤춘다.
이 마지막 연이 이 시를 위대한 작품으로 만듭니다. 수선화는 이미 사라진 풍경이지만, 기억 속에서 언제든 다시 피어납니다. 자연은 순간의 감동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저장되는 치유의 이미지로 남는 것입니다.
추사의 수선화가 고요한 고독의 미학이라면, 워즈워스의 수선화는 고독 속에서 피어나는 기쁨입니다. 1월 2일이라는 날짜는 아직 세상이 완전히 열리지 않은 시간입니다. 새해의 다짐도, 계획도 아직은 희미한 상태. 그런 날에 노랑수선화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은 외로워도 괜찮다. 언젠가 이 시간은 마음속에서 황금빛 들판이 되어 다시 피어날 테니.
수선화는 결국 ‘기억의 꽃’입니다. 눈앞에 피어 있는 순간보다, 사라진 뒤에 더 오래 우리를 위로하는 꽃. 워즈워스가 그랬듯, 우리가 어떤 날 문득 떠올리게 될 풍경 하나를 남겨주는 꽃이 바로 노랑수선화입니다.
[참고 문헌]
William Wordsworth,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1807)
https://youtu.be/Z6KJTeZi3zI?si=2FC7IqTxXFDRhVT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