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에 흩뿌린 붉은 고백, 칼리안드라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공중에 흩뿌린 붉은 고백, 칼리안드라
Calliandra surinamensis

서울식물원의 온실에 들어서는 순간, 계절의 감각이 조용히 뒤집힙니다. 바깥에서는 겨울이 모든 색을 거두어들이고 있지만, 유리 지붕 아래에서는 초록이 여전히 숨 쉬고 있습니다. 그 초록의 바다 한가운데서 유독 시선을 붙잡는 붉은 존재가 있습니다. 칼리안드라(Calliandra surinamensis)입니다.


처음 이 꽃을 마주했을 때, 저는 그것이 땅에서 자란 식물이라기보다 공중에 떠 있는 감정의 폭발처럼 느껴졌습니다. 주먹만 한 크기로 부풀어 오른 꽃송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꽃의 형태를 거부하듯, 수백 가닥의 붉은 수술을 사방으로 뻗어 하나의 둥근 불꽃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이 가장 본질을 드러낼 때


칼리안드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칼로스(kallos, 아름다움)’와 ‘안드로스(andros, 수술)’에서 왔습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수술’이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꽃이 꽃잎으로 자신을 꾸미는 반면, 이 식물은 생명의 통로인 수술을 가장 앞에 내세웁니다.


식물학적으로 보면 이는 수정을 돕기 위한 전략이지만, 문학적으로 바라보면 이는 가장 연약한 부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용기처럼 느껴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가리지 않을 때, 비로소 존재는 스스로의 빛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낮과 밤, 두 얼굴의 리듬


칼리안드라는 밤이 되면 또 다른 표정을 보여 줍니다. 낮 동안 햇빛을 향해 펼쳐졌던 잎들은 해가 지면 조용히 서로를 향해 접힙니다. 자귀나무처럼 ‘수면 운동’을 하는 식물입니다. 낮에는 붉은 꽃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밤에는 잎을 접어 스스로를 감싸 안는 이 모습은 묘하게 인간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꽃의 꽃말 가운데 하나가 ‘결합’인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밖을 향한 열정과 안을 향한 보호가 한 식물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존의 화가가 기록한 붉은 생명


영국의 식물화가 마가렛 미(Margaret Mee)는 평생 아마존의 식물들을 그리며 정글의 생명력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그녀는 칼리안드라를 “정글의 심장처럼 박동하는 붉은 존재”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세밀화 속에서 이 꽃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혹독한 자연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생명의 의지로 살아 있습니다.


서울식물원의 온실에서 만난 칼리안드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국의 숲에서 태어난 식물이 이곳의 겨울 한복판에서도 당당히 피어 있다는 사실이, 조용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겨울에 만나는 뜨거운 질문


남아메리카의 태양 아래서 태어난 이 꽃이 서울의 겨울 속에서도 이렇게 붉게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묘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종종 환경과 계절을 핑계로 자신의 열정을 접어 두곤 합니다. 그러나 칼리안드라는 자신이 놓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방식으로 충분히 빛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온실을 나서는 길,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닿았지만 제 눈앞에는 여전히 붉은 수술의 잔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꽃이 아니라, 아직 제 안에도 꺼지지 않은 무언가가 살아 있느냐고 묻는 하나의 고백처럼 느껴졌습니다.


요약 정보

· 학명: Calliandra surinamensis
· 영명: Powder Puff Plant
· 원산지: 남아메리카 북부(수리남·브라질·가이아나 일대)
· 분류: 콩과(豆科, Fabaceae)
· 꽃 특징: 꽃잎보다 수술이 발달하여 둥근 붉은 공 모양을 이룸
· 개화: 열대 및 온실 환경에서는 연중 개화 가능
· 잎 특징: 밤이 되면 서로 접히는 수면 운동
· 꽃말: 결합, 열정, 마음의 교류


https://youtu.be/GZyig-VSgas?si=waMnBQSP8OHNaQ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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