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 이야기
추운 겨울, 앨범을 정리하다 지난 봄 수목원과 우리 아파트 화단에서 찍은 모란 사진에 발길이 멈췄습니다. 한 송이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화려함, '꽃 중의 왕'이라 불리는 모란을 보고 있으면 제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함박꽃처럼 피어납니다.
모란은 예로부터 '부귀화(富貴花)'라 불리며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많은 분이 작약과 헷갈려 하시는데, 가장 쉬운 구분법은 '나무'인지 '풀'인지 보는 것이에요.
모란(목단): 겨울에도 줄기가 살아있는 나무입니다. 잎 모양이 오리발처럼 뭉툭하게 갈라져 있죠.
작약: 겨울에는 땅 위 줄기가 사라지는 풀입니다. 잎이 뾰족하고 광택이 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는 흔히 선덕여왕의 일화를 통해 모란에 향기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모란 곁에 다가가 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모란은 그 자태만큼이나 은은하고 깊은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왕의 영민함을 강조하려던 기록이 이토록 향기로운 꽃에 '무향'이라는 오해를 남긴 셈이니, 꽃의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있게도 서양에서 모란은 '피오니'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을 치료하던 의사 '파에온'에서 유래해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죠. 동양에선 '왕의 위엄'을, 서양에선 '수줍음'과 '신부의 순결'을 상징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찬사를 받는 꽃임이 분명합니다.
제게 모란은 단순한 꽃 그 이상입니다. 어린 시절 산골을 떠나 처음 마주했던 외삼촌댁 마당의 그 눈부시게 큰 꽃. 외삼촌은 "이것이 함박꽃이랑게요!"라며 동생인 저희 어머니께 자랑을 늘어놓으셨죠.
내 얼굴보다 큰 그 꽃이 너무 탐나서 엄마에게 우리도 심자고 조르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어디다 심을라고? 니 손바닥에 심을래? 나중에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때나 키워라."
마당 한 평 갖기 어려웠던 그 시절, 엄마의 그 모진 말 속엔 가난한 형편에 대한 속상함과 딸만큼은 귀한 꽃 피우는 너른 마당 있는 집에 살길 바라는 투박한 사랑이 섞여 있었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지금도 아파트에 살지만, 감사하게도 단지 화단을 관리하며 목단 두 그루와 모란 서너 그루를 애지중지 키우고 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어 꽃망울이 터질 때면, 이제는 곁에 없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니 손바닥에 심을래?"라던 어머니의 꾸중은, 수십 년 뒤 제가 이토록 많은 이웃과 꽃의 아름다움을 나누는 '마음 부자'가 되라는 축복이었나 봅니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지난봄의 모란을 복습하며, 다시 올 봄을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엔 어떤 '함박꽃'이 피어 있나요? 화려한 꽃송이 뒤에 숨겨진 저마다의 이야기가 우리 삶을 더욱 향기롭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올 봄, 제가 가꾸는 화단에 모란이 피어나면 그 향기를 타고 어머니께 안부를 전하려 합니다.
https://youtu.be/c39ZNbnPihA?si=Xm_n5D5HTKVxcO1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