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낭만이 가득한 소녀에서 아이둘 엄마로,
중학교 1학년쯤 친구따라 얼떨결에 간 그곳은 나무냄새와 향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성당이었다. 할머니는 절에 다니셨지만 내가 성당을 다니는 것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리고 거긴 좋은 곳이라며 안심하셨다. 그보다 더 어린 초등학생시절 나도 모르게 사이비 종교에 빠진 적이 있었기에 할머니는 차라리 성당이 낫다하셨던 것 같다.
교회든 성당이든 그곳이 사이비이든 나는 어딘가에 간절히 의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위안을 얻고 싶었다. 부모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과 인정욕구를 채울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에 지나치게 종교에 빠지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어찌됐건 나는 그날로 또래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학생부 미사(예배)는 토요일 오후시간이었는데 나는 학교에서 마치자마자 책가방을 던져두고는 성당에 가기 바빴다. 나는 찬양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설교 말씀은 사실 조금 지루해 졸기 일쑤였지만 사실 무엇보다 더 좋았던 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정확히는 언니 오빠들!
나보다 기껏해야 한 두살 혹은 네다섯 살 터울의 언니 오빠들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 큰 어른처럼 느껴질 정도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대체로 모태신앙 출신(?)들이었는데 그들의 부모님들은 성당의 중요한 직책을 맡거나 학교선생님이거나 아주 신실한 믿음을 가진 듯 해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자녀들은 나랑은 왠지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우 밝고 선하고 세련됐으며 똑똑하고 조금은 부유해보였다. 나는 그런 언니 오빠들이 참 좋았지만 그와 정반대로 느껴지는 나 자신을 볼 때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을 좋아했기에 성당에서 하루종일 살 정도로 열심히 기도모임과 미사준비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 당시 학생부 미사 반주는 늘 통기타 두대로 진행되었는데 중학생이던 반주자 언니 오빠들이 고등학생이 될 무렵 인수인계가 필요하다며 나를 불렀다. 나에게 기타를 가르쳐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 동경하던 반주자 자리에 내가 앉을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물론 그 당시 나의 용돈으로는 개인 기타를 살 형편은 안됐기에 당분간 성당에 있는 연습용 기타를 빌려서 배우기로 했다.
마침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레슨을 받게되었다. 웃는 얼굴이 각시탈마냥 반달눈이 되던 천사같이 착한 선배언니와 눈매가 비슷하게 선한 개구지면서도 다정한 그 오빠에게 번갈아 배우게 되었다.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아 추운 바람이 새차게 부는 날에도 씩씩하게 성당으로 향하곤 했다.
너무 추워 손이 꽁꽁 얼어도 얼굴이 촌년병마냥 홍당무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차갑고 건조한 손으로 한 시간 내내 기타를 잡느라 손 끝에 피가 나도 그저 좋기만 했다. 피가난 손은 곧 상처가 아물면서 굳은 살이 올라왔고 다시금 딱딱해진 손끝은 오히려 기타를 잡기에 유리했다.
그렇게 피가 나게 연습한 결과 나는 어느덧 반주자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로부터 기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흘러 나도 어느덧 인수인계를 해주어야 할 때가 되어 동생들을 내가 아는 한에서 열심히 가르쳐 반주자 자리를 내어주었다.
드디어 스무살이 되어 대학을 갔다. 새내기의 부푼 마음은 대학생활의 꽃인 동아리 활동으로 이어졌고 단연 기타동아리를 망설임없이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잘 치는 선배들 사이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지만 그저 선배들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사회에 나와 여러 일을 하면서도 취미생활로 기타와 노래를 틈틈이 연습하곤 했다. 그러다 몇몇 선배들과 노래모임을 만들게 되었고 우리는 어설픈 실력이지만 버스킹을 하기 시작했다. 노래하다 삑사리도 나고 가사도 까먹고 엉망진창일때도 있었지만 그 시절 그것은 낭만 그 자체였다.
그러다 선배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하나 둘 흩어지고 나는 방구석 낭만을 즐기는 신세가 되었다. 혼자서 자취방에서 기타치며 노래 부르는 영상을 찍어 SNS에 올리니 뜻밖에도 너무 잘한다며 지인들에게 칭찬을 받곤 했다.
나는 사실 엄청 잘 치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저 단순한 코드에 쉬운 주법으로 유행가 몇 곡 정도 치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어린시절 배웠던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았기에 용감하게 버스킹도 하고 과감히 영상을 찍어 올리는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혼과 함께 육아를 하면서 나의 기타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나름 기타를 잘 아는 선배에게 추천받아 좋은 기타를 샀건만 이건 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버리긴 아깝고 이래저래 고민하다 당근마켓에 아주 싼 가격으로 팔고 말았다.
그 당시 사간 사람조차 의아해 할 정도로 좋은 물건을 헐값에 파는 것이 무척 속이 쓰리긴 했지만 육아를 하면서 더 이상 개인적인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다는 생각에 과감히 처분을 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아이들은 자란다’는 것이다. 아이둘을 유치원에 보내고 낮시간엔 알바를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내 시간, 나만의 취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이가 자라면서 온전히 엄마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나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열정도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기타를 다시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당근에 팔았던 나의 기타와 같은 것이 또 있을까 하여 당근마켓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마땅한 것이 없었기에 인터넷으로 가성비 좋은 기타를 찾았고 배달의 민족답게 바로 오전에 주문한 기타를 그날 밤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나는 최대한 소리를 줄여 기타줄을 튕겨보았다. 인터넷에서 급히 악보를 찾았고 코드를 짚어보았다. 손이 굳긴 했어도 그럭저럭 코드를 보고 저절로 손이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기타를 손에서 놓은 것이 큰아이 나이만큼이니 딱 7년만이다.
나는 7년만에 나의 첫사랑을 만났다.
부드러운 바디의 촉감과 묵직한 나무냄새, 손끝에서 느껴지는 아릿함은 나를 무척이나 흥분시켰다. 14살 소녀가 느꼈던 첫사랑의 감정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 시절 추울때나 더울때나 나와 함께 하며 나를 성장시켜 준 이 존재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극단적인 비유이지만 마치 잘려나간 나의 신체 일부가 다시 재생이 되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다시 나에게 와 준 그대가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