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인용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인지 공기가 상쾌하다. 대부분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지만 괜시리 일찍 집을 나서본다. 일하러 가기 전 한 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은 마치 뜻밖의 선물같달까. 고작 알바일 뿐이지만 나름 워킹맘은 늘상 바쁘기에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때론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오늘처럼 날 위해 시간을 내 줄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딱히 배가 고픈건 아니지만 가만히 있기는 뭐해 커피 한잔을 주문한다. 사실 커피를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좋아하는 메뉴도 없기에 결정장애인 나는 그저 메뉴판 맨 위에 있는 것을 주문하는 것이 속 편하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한 모금 마신 뒤 휴대폰을 쓱 훑어본다.
연락처 목록을 보며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미뤄왔던 이들에게 문자 한 통씩을 보내본다. 몇 번을 지웠다 썼다하며 장고의 고민끝에 전송버튼을 누른다. 정말 평소엔 무심하다 싶을만큼 연락을 잘 하지 않는 나는 안부문자 하나 조차 쓰기가 이토록 떨린다.
그저 문자일뿐인데도 상대방에게 답장이 바로 올까, 늦게 올까, 뭐라고 올까, 상대방이 불쾌해할까, 좋아할까, 부담스러워할까 등 오만가지 상상이 다 든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진을 다 빼고는 결국을 연락을 하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나는 그렇게 소심하다.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혼자 속으로 판단하고 지레 겁먹거나 포기해버리는 그래서 인간관계가 매우 협소한 나는 그런 사람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나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변화는 얼마나 두렵고 괴로운 일이던가. 그것이 아무리 좋은 쪽이라 한들 내 몸과 정신은 그저 해 오던 대로 관성을 유지하려 하지 선뜻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용기내어 몇 통의 문자를 보내고 일을 하러 나섰는데 그 사이 몇몇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참으로 나의 연락에 반가워했고 고마워했다. 내심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답장을 하지 않은 이도 있었지만 나는 그가 왜 답장을 안하는지도 알기에 그저 내 마음을 읽어준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하니 그의 무반응이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로 인해 상처받았을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 뿐이니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을 믿는다 고백하지만 나는 날마다 (나보다 약한 존재라 생각하는)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반면 바쁟다는 핑계로 친구나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음식이나 SNS에는 거의 중독자처럼 살아온 날들이 많았다. 그런 내 모습에 또 스스로를 자책하며 몸과 영혼을 파괴시키는 일들을 악순환처럼 반복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도무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부끄러운 존재가 되버렸다. 물론 교회에 다닌지는 채 몇년이 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교회에서는 집사라 불리며 고상한 척 하지만 실상 현실의 모습은 그러지 않으니 이중적인 내 모습에 어느 순간부터 환멸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럴거면 교회는 왜 다녀?’ 스스로에게 자책에 가까운 질문을 해 보았다.
답답한 마음에 이런 저런 유튜브를 보다 C.S.루이스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1900년대 초중반에 활동한 영국의 영문학 교수이자 소설가인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 ‘나니아 연대기’의 원작자였다. (물론 나는 나니아 연대기를 영화로도 보지는 않았지만)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나를 위해 마치 준비라도 한듯 유투브를 켜면 기독교에 관한 영상이 연달아 떴고(물론 유투브의 알고리즘 덕분이겠지만) 그렇게 놀라운 우연으로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를 읽게 되었다.
BBC라디오 방송에서 강연한 내용을 엮은 책인만큼 문체가 말하듯 술술 읽힌다는 점과 기독교에 대해 모르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쉬운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나는 항상 주를 그리스도며 우리는 그의 지체라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지체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자책할줄만 알았지 진정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기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반 정도를 읽다보니 이런 반가운 구절이 나왔다.
[살아있는 몸은 죽은 몸과 달리 상처를 입었을 때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절대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도까지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 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 ㅡ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키며 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자발적인 죽음을 반복할 수 있게(어느 정도까지는)해 주므로 ㅡ 이라는 뜻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110p - C.S.루이스
하나님이 (성경으로는 깨우치지 못하는) 무지한 날 위해 이토록 친절히 알려주시는건가 싶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실 낮에 마신 진한 커피 탓인지 밤새 잠을 뒤척이다 새벽2시에 깨버리고 말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깨버렸지만 정신은 맑은 덕에 책을 읽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고요한 새벽은 참회하기 좋은 시간이다. 나는 늘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과 때론 죄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기에 날마다 반성하며 다시금 새로 시작할 힘과 용기를 얻는다. 이제까지는 자책하며 비난하는 말로 나 자신과(혹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이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듯이 나의 속사람이 변화될 것을(꼭 주님이 변화시켜 주실 것을)믿는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