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의 나로 돌아가기
타지역의 폭설에는 새발의 피도 못 미칠만큼 진눈깨비같은 것이 흩날리는 새초롬한 날씨의 아침이다. 11월에 한파라니 갑자스러운 추위에 청승맞게 서글퍼진다.
한달 전부터 예고된 유치원 음악발표회는 작년에는 토요일에 하더니 올해는 평일 일주일동안 반별로 나눠서 진행을 한다고 한다. ‘아니 일하는 엄마들은 어떡하라고?’ 일정표를 처음 받아보고는 나는 당황스러웠다. 큰애는 올해가 마지막인데 막내는 올해가 첫 공연인데 이래저래 마음이 속상하기만 했다. 평일 오전 출근시간이랑 너무 겹치는데다 자영업을 하는 남편마저 일하느라 못 가본다하니 그저 주변 엄마들에게 나 대신 사진이라도 찍어달라 부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엄마 아빠 없는 아이 마냥 그렇게 아이들을 두는게 못 내 마음에 걸려 눈도장이라도 찍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순서가 중간쯤이라 출근 시간이 다 되가도록 막내는 나오질 않았다. 안절부절하며 땀이 삐질삐질나기 시작했다. ‘아, 어쩌지 보고 가야하는데..’ 결국 기다리다 못해 그냥 돌아가려는데 선생님이 붙잡았다.
“어머니 어디 가세요? 00반 공연 이제 시작할거에요”
정말 막내반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화려한 반짝이 복장에 어설프게 따라하는 몸짓이 그저 귀엽기만 했다. 나는 좌석에 앉지도 못하고 옆쪽 끝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막내는 엄마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를 발견하여 반가워하는 아이 눈빛에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출근을 하러 나서야 했고 차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다음 순서에도 또 엄마를 찾을텐데 우리 애기 엄마 없는 걸 알고 속상해하면 어쩌나.
아니나 다를까 아이친구 엄마가 찍어준 영상에서 막내는 연신 엄마를 찾는듯 두리번거렸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이름을 불러주며 웃고 있는데 우리 아이만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엄마를 찾아 두리번 거리는 모습에 그 엄마도 찍으면서 눈물이 나더란다.
영상을 보내주는 그 엄마의 따뜻한 마음이 참 고마웠다. 사실 그 엄마는 같은 반이 아니라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마음을 쓰고 함께 걱정을 해주었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찡해졌다.
그러면서 나의 5살을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엄마와 함께 했던 순간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 커서 들었지만 엄마는 5살 때 집을 나갔다했고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없었다. 아빠도 멀리 일하러 나가는 바람에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대신 유치원 소풍때는 아가씨처럼 젊은 작은 숙모가 엄마 대신으로 따라갔고(그래서 엄마가 아닌게 티가 났지만), 휴일에는 큰고모와 고모부가 엄마 아빠 대신 차를 태워 놀러다녔다. (그 당시 고모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첫 조카인 나를 유독 예뻐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졸업식때는 큰 숙모와 할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엄마가 없어도 대신해 줄 가족이 있어서였을까. 그냥 엄마가 없는게 너무 당연해져버려 울거나 슬퍼하거나 엄마가 보고 싶다 말한적도 없었다. 오히려 친척들이 가끔 넌 엄마가 안 보고 싶냐고 물으면 엄마 없는 내 처지를 자꾸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더 괴로웠다. 나는 어느 순간 그리움이란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몸이 커갈수록 존재의 의문도 커져갔다. 나는 분명 고아는 아니라 생각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날 고아처럼 대한다. 늘 동정의 눈빛으로 측은하게 바라봤다. 어린 나는 부모가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정작 내 곁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은 왜 한걸까? 양육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아이는 왜 둘이나 낳은걸까?
사춘기가 되니 나는 그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에 가득차 그때부터 우울과 자해와 깊은 공허함에 빠져 빨리 죽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마음 밑바닥은 썩어가면서도 우울을 숨기며 가면을 쓴 채 살기 시작했다. 몸은 자라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지만 그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그 어떤 존재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모성애는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애틋하거나 감동을 느끼거나 하는 건 낯간지럽고 창피하다 여겼다. 감정에 한 없이 차가웠던 나는 아이를 냉랭하고 무관심하게 대할때가 많았다.
특히나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너무 싫었는데 울고 떼를 쓸 때면 극도로 신경질적으로 화를 냈다. 그렇게 미친듯이 화를 내고 나면 자책감에 빠져 ‘이런 엄마일거면 차라리 없는게 나아’ ‘아이들도 이런 엄마는 원하지 않을거야’ ‘나도 내가 싫은데 아이들은 얼마나 내가 싫을까’ 라며 또 자해를 반복했다.
부모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슬픔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외면한 채 살아온 결과였다. 결국 나 자신에게도 위로와 존중을 못 받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그때 울며 불며 엄마 찾아달라고 울었다면 좀 더 건강한 자아로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 된 지금 나는 5살의 마음으로 펑펑 울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이를 통해 나의 어린시절을 떠올려 그 때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울지 못하고 남은 응어리들을 지금이라도 토해내듯 울어버릴 수 있어서 그 눈물이 참 아프지만 감사했다.
유치원 버스에서 씩씩하게 내리는 아이들을 보며 하나님이 날 위해 이 아이들을 보내주었나, 이토록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통해 내가 못 받은 사랑을 채우라고 보내주신건가 싶어 너무 감사해 또 눈물이 났다.
이제껏 부모를 원망하며 내 아픔에 빠져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조금 우리의 부모의 아픔도 알 것 같다. 그들 또한 상처받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그 원망이 어느새 연민으로 바뀌게 되었다.
육신의 부모는 그들 또한 불완전한 존재이자 상처받은 존재들이기에 자식들에게 원치 않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나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과 아이들을 잘 보살피는 것 또한 부모이기에 해야할 역할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다닌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이제야 성경을 읽으며 이제껏 풀리지 않았던 많은 의문들 중 하나인 나는 왜 태어났나를 알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창세기 1장>
그렇구나,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오늘도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내가 엄마라서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