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사람은 연애나 결혼을 한다고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 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지 않을까. 가족이라는 관계안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지내고 심리적으로도 가장 친밀할 것 같지만 의외로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무관심하게 살아가는게 현실의 부부생활일 것이다. (물론 보기 드물지만 사이좋게 잘 지내는 부부들을 보면 참 부럽다)
결혼 전엔 그저 나이 많은 남자가 막연히 책임감있고 뭔가 성숙한 어른남자의 모습일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얼렁뚱땅 결혼이라는 걸 해버렸다. - 그 환상이 없었다면 물론 결혼을 하지 않았겠고 (아니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의 나도 없겠지. 그렇기에 결혼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종종 가시에 찔리듯 생채기를 내며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것이 조금 아프고, 그 상처입은 나를 어루만져야 하는 시간이 가끔 서럽게 느껴질 때가 있을 뿐이다.
그런 나에게 글쓰기는 아픈 나를 어루만지는 치유 행위이자 나를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버림받은 나 자신을 마주하기는 참 어렵고 불편하지만 그것 마저 하지 않는다면 답답하고 숨이 막혀 아마 끔찍한 인생을 살거나, 인생을 살지 않는 선택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여전히 살아있고 크고 작은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가며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이제껏 돌아보면 기분좋고 평온 할 때는 굳이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저 행복한 일들을 만끽하면 그 뿐, 굳이 글로 남겨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그리 순탄하기만 할까, 하루 건너 하루 일어나는 사건 사고와 말로 주고 받는 상처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꿋꿋이 내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당장에 내 손으로 키워내야 할 아이들이 있고, 나의 온갖 더러운 행실과 죄악에도 끝까지 사랑해주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남편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것이 아닐까. 로맨스를 신의 영역에 치환시켜놓고는 진정한 사랑이라면 ‘남편은 나에게 ~~~이래야만 해’라는 관념을 씌워놓고 그것대로 행하지 않으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라며 울부짖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남편과 나 사이를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 원인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일어나도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자기 할일 하기 바쁘고 각자의 역할을 해내느라 기계처럼 살아가지만 정작 그 속에서 외로움은 점점 더 커져간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만 한번도 살을 부대껴 본 적이 없고(아이 가질때 외에는)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이미 부부가 된 이상 이런 문제를 비단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께 노력하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이 태반인데 우리는 어쩌다 제 팔 제가 흔드는 격으로 각자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런 부분에서 나의 불만은 점점 쌓여가고 처음엔 잔소리를 하다가 변하지 않는 그를 보며 지쳐가고 조금의 곁도 내주지 않은 남편을 보며 상대적인 외로움은 더 커져만 갔다. 그런 과정에서 다툼이 생기면 우리 아이들은 연약한 상태에서 상처를 받게 되고 또 그 지긋지긋한 역기능 가정이라는 꼬리표가 대물림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싸우는 상황만은 피하고자 참고 또 참고 글로라도 풀어내고자 그토록 새벽마다 글을 써댔었다.
그러다 문득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남편도, 부모 자식도 그 누구도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미안했다. 신도 아닌 나와 같은 연약한 그에게(단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는 이유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바라왔던 것에 대해. 내 부모도 아닌데 나를 온전히 책임져주길 바랐던 것에 대해. 나의 잘못과 약점에는 눈을 가린채 오직 남편의 작은 실수와 부족함만을 들추고 비난했던 것에 대해.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렇게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잘못을 회개할 때 남편의 아픔이 보이고 오십이 넘은 아저씨가 아닌 그저 10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 보였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폭력에 가까운 양육환경에서 몸만 자란 어른아이가 나의 남편임을 알게 되었다. 살아남기위해 그저 치열하게 버텨내야 했던 상처많은 어린 소년, 그 아이가 본인과 비슷한 상처투성이 인간을 만나 아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의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알아버리게 되었다.
자기 딴에는 그래도 자신만은 무책임한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한다는 그 사명 하나로 성실하게 살아오고 있는데 성실하게 돈 벌어오는 것, 그것 밖에는 할 줄 아는게 없는데 왜 이것도 못하냐, 저것도 못하냐 타박과 잔소리만 하는 아내가 그저 귀찮고 성가시게 여겨졌을 것이다. 자신의 아픔은 알아주지 않고 힘들다고 투정만 하는 아내에게 서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감정 표현조차도 서툴러서 하지 못하는 자신이 또한 답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남자로서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 또한 비참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추측이긴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남편은 나와의 대화를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남편의 처지가 이해가 되면서 응어리진 감정들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낀다.
‘역지사지’ ‘동병상련’
오늘 글쓰기의 결론은 이것이다.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남편의 상처를 조금 따뜻이 바라봐준다면 그것이 결국 나를 치유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 그리하여 그토록 내가 바라던 소박하고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 이것을 이뤄가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