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가연 Jun 07. 2023

'뜻 밖'이 주는 선물

일주일 간 런던 여행 중 나는 문화생활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뮤지컬 겨울 왕국, 위키드, 연극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관람에 이어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코톨드 갤러리와 같은 박물관, 미술관 탐방을 즐겼다. 그중에서도 코톨드 갤러리는 여건이 되면 방문하고자 선택 일정에 넣어뒀는데 만족도가 높아 기억에 남는다. 대영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는 무료입장이었지만 코톨드 갤러리는 입장료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드 결제가 막혔다.


체크카드도 하나뿐이고 현금 한 푼 없어 멘붕에 빠졌다. 가진 거라곤 오이스터 카드, 돌아갈 교통비뿐인 셈이었다. '어쩌자고 나는 카드가 하나인 것인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결제를 시도하는 횟수만큼 잿빛으로 변하는 나에게 직원 분이 혹시 학생이냐고 물었다. 학생은 맞는데 학생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삼성페이를 알게 된 이후로 나에게 지갑이란 마치 카세트 플레이어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까.


직원 분이 학생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뭐라도 있으면 무료입장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재빨리 사진첩에서 학생증 사진을 찾아 감사하게도 무료 입장할 수 있었다. 친절한 직원 분과 나의 어려 보이는 얼굴에 감사했다. 세 차례의 휴학으로 이제 한국에서는 "학생이세요?"보다 "직장인이세요?"를 더 많이 듣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영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는 각각 영국을 대표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라는 생각에 기대치가 높았다. 그렇지만 정작 대영박물관에 들어서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관람해야 할지 모르겠고 사람도 무척 많았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다름 아닌 '한국관'이다. 먼 나라까지 와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을 한국화와 백자를 보며 감탄했다. 그 외에는 두리번두리번 엄마 찾는 오리 마냥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인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반면에 코톨드 갤러리는 뜻밖의 무료입장을 했다는 점에서 관람 시작부터 들뜬 마음이었고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기에 큰 기대도 없었다. 오히려 코톨드 갤러리에서 만난 고흐, 드가, 르누아르 등의 그림을 통해 내가 인상주의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뜻밖의 취향 발견이었다. 더불어 공간이 작아서 서둘러 이곳저곳 이동하며 관람해야 한다는 압박도 없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음미할 수 있는 조용하고 편안한 환경이었다. 


아직도 카드 결제가 막혀서 당황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눈앞이 캄캄하다. 그날 나는 코톨드 갤러리 관람을 마치고 무료입장이 가능한 대영박물관으로 이동해 둘러보다가 '너무 배가 고픈데 밥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아쉽게 숙소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덕분에 영국에서 '학생'이라 하면 한국처럼 중, 고등학생만 할인이 되는 게 아니라 대학생도 해당하다는 걸 알았다. 아울러 미술관이든 박물관이든 명성과 크기, 작품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취향에 맞는 전시라면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당시 그 순간 느꼈던 암담함에는 유감이지만, 뜻밖의 선물을 얻은 셈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