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2022년 5월 14일
느지막이 일어나 조식을 먹고, 슬리퍼를 신고 이른 아침의 대성당 광장에서 산책을 했습니다. 배낭을 메고 걷지 않는 하루가 어색합니다. 오전 9시임에도 벌써부터 하나 둘 순례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어제와는 다른 이들의 새로운 환호와 축제가 하루의 시작을 알립니다.
순례길은 100킬로미터 이상을 걸으면 순례자 인증을 해줍니다. 산티아고 대성당 근처 순례자 사무소에서 순례자 여권에 찍힌 도장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발급해주는데, 100킬로미터 구간부터는 하루에 2개의 쎄요(도장)를 받아야 한다는 룰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아주 엄격하게 확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순례자 사무소에 하루에 도착하는 순례자가 1,3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선지 어제는 오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30분 정도 줄을 서서 일을 볼 수 있었습니다. 2유로를 내면 순례자 인증서가 구겨지지 않도록 지관에 넣어 주고, 3유로를 더 내면 몇 킬로미터를 얼마나 걸었는지 거리가 기입된 추가 인증서를 발급해줍니다. 9년 전에는 3유로가 아까워서 그걸 못 받았던 게 아쉬워서 이번에는 둘 다 받았습니다. 내 인증서를 발급해준 사무소의 할머니는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몇 번이나 "콩크레츄레이션!" 하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습니다.
배낭에 대한 이야기
분명히 줄이고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딱 10kg이 나왔습니다. 사실 발의 물집은 오래 걷는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무거운 하중에 눌려 자극이 반복되면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샴푸고 린스고 잡다하게 짐이 늘어나는 게 싫어서 그냥 비누 하나를 잘라 와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는 노력을 했음에도, 한 인간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도보여행을 하는 일에는 그만큼 품이 많이 드는 같습니다. 물론.. 이번 순례길에서 멋진 풍경 좀 담아 보겠다고 카메라에 무거운 광각렌즈까지 달아서 가져온 일은 걷는 내내 두고두고 후회했으나 '아 라셰'에서 새벽에 밤하늘을 찍었을 때는 모든 게 용서되었습니다.
유용했던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
단연코 등산스틱. 9년 전 스틱 없이 걸었을 때의 무릎의 통증과 피로도는 이번과 비교하면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무릎 보호대도 한몫을 했고요. 400킬로미터 가까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무릎 통증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단, 순례길 특성상 산뿐만 아니라 마을과 도시를 많이 통과하므로 스틱이 땅에 닿는 뾰족한 부분에 고무 커버를 씌우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런 보호장치 없는 스틱의 뾰족한 쇠 부분이 보도블록에 닿을 때마다 '딱! 딱!' 하는 소리를 내며 걷는다면... 현지인들이 도끼눈을 뜨고 당신을 쳐다볼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바로 물을 꺼내 먹을 수 있는 힙색, 자주 신발을 벗게 되는 순례길 특성상 끈을 묶지 않아도 쉽게 조이고 풀 수 있는 다이얼 방식의 등산화 등이 고된 여정에 작지만 중요한 편의를 제공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 9년 전에도 그랬듯, 여행을 준비하면서 네이버 카페 <까미노 친구들 연합>에서 선배 순례자들의 여러 유용한 조언을 참고했고, 서촌의 카페 알베르게 @cafealbergue에서도 저의 여정을 공유하며 늘 큰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댓글로 건강한 완주를 바라 주셨던 감사한 분들 덕분에 이곳에서 이렇게 여정을 되짚으며 여독을 풉니다.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게 되겠지만,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의 따뜻한 호의는 언제까지고 제가 걸어갈 길 위에서 오래도록 함께 할 거예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