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대가
또다시 8월 17일이다. 다들 잊었겠지만 이 날은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날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정치인이자 <사상계>를 출판한 언론인으로 박정희의 독재를 질타한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정부는 실족사라고 주장하나 2013년 3월 민간조사위원회에서는 타살 의혹을 제시했다.
선생은 1944년 7월 중국 장수성 서주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장장 6천 리나 떨어져 있는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50여 명과 함께 다음 해 1월 도착한 후 광복군이 되었다. 4월에 일본군을 교란하는 역할을 하는 한미합동작전 특수훈련병이 되어 8월 14일 한반도에 진입하려 했으나 해방으로 이루지 못했다. 해방 후에는 언론인으로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했고 친일파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의문사를 당했다.
박정희와 장준하 선생은 단 한 살 차이이나 박정희는 일본군 중위 출신의 친일파로 일신의 영달을 꾀했고, 장준하는 광복군 대위 출신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해방 후 처단을 받았어야 할 박정희는 오히려 국군장교가 된 후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아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가 해방 정국에 오히려 국권을 되찾으려 한 광복군을 탄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장준하 선생의 사망 원인은 48년째 숨겨져 있다. 그동안 민주정권이 세 번이나 정권을 잡고도 이를 밝혀내지 않았다. 과거의 일에 침묵한 대가는 '세월호 사건, 이태원 사건, 올해의 오송 물난리 사건' 등, 그 어느 것에도 책임을 제대로 추궁할 수 없었던 것으로 돌아오고 있다.
친일파는 3대가 흥하고 애국하면 3대가 망한다는 사실이 박정희의 가족과 장준하의 가족에서도 비롯된다. 박정희의 가족은 비록 암살되고 탄핵되었으나 대를 이어 대통령을 지냈고, 상대적으로 장준하의 가족은 힘든 생활을 대를 이어 하고 있다.
작금에 일어난 ‘채 상병 수사에 대한 해병대 외압 사건’도 흐지부지 책임지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면 유사한 일은 또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