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목소리의 형태>
혹자는 우리나라에 개봉했던 이 영화가 <너의 이름은>에 뒤를 이어 대단한 흥행을 하리라 예언했다. <목소리의 형태>는 <너의 이름은>과 함께 일본 박스오피스를 '흥행 쌍끌이'하던 영화다. 두 영화는 학생의 이야기라는 점,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 등 다양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서로 차이가 크다. 그것은 다만 결말이나 작화 상의 차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두 영화가 보여주는 차이는 명확한 시각의 차이에 있다.
이 이야기는 사사롭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그러나 사적인 것이 드러내는 바는 더욱더 내밀하다. 어린 시절, 학교는 이상한 공간이다. 치기 어린아이들은 꽤나 미숙해 보이지만 자기들 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세계를 만들기도, 부수기도, 나누기도, 합치기도 한다. 이것은 어떤 지식의 영역이 아니다. 이곳에는 선도 악도 없다. 다만 각자가 타인을 만나는 방법을, 세계를 만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목소리의 형태>라는 제목은 이 이야기가 가진 모호함을 잘 표현해낸다. 이 여정은 형태가 없는 것의 형태를 찾아가는 것이다. 또한, 목소리는 제대로 듣고 나서야 이해를 하게 된다.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목소리는 상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되고 나서야 의미의 형태를 형성한다. 이것은 전달되기 전까지는 다만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공기 속의 떨림으로, 그저 대답 없는 메아리로 흘러나갈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 세계를 만드는 것에 일조한다. 내 목소리가 타인에게 닿아야 세계를 형성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은>이 보여준 것이 다소 공적인 영역이었다면 <목소리의 형태>가 보여주는 것은 사적인 영역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세계를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 나온 주인공들은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고 미숙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목소리의 형태>에 나온 인물들이 '더욱 학생' 같다. 그리고 앞선 작품과 달리 그렇게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진 않지만 소소하면서 따뜻한 색감이 계속 감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그리고 포스터와 스틸컷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평범한 소년소녀의 성장물이었다.
이 예상은 반이 맞았고 반이 틀렸다. 혹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목소리의 형태>에 나오는 인물은 평범하지만 이야기는 평범하지 않았다. '평범'하다는 것은 그 말만큼이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게 '친구'일까. 남자 주인공, 이시다 쇼야는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 언제나 앞장서곤 했다. 맨 앞에서 친구들을 이끌던 쇼야는 전학생 니시미야 쇼코를 '이지매'(집단 따돌림)했다는 이유로 다른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그렇게 쇼야는 '친구'를 잃어버린다. 쇼야는 방황한다. 쇼야에게 묵묵하고 뒤틀린 방황의 끝은 생의 끝으로 여겨졌다. 쇼야는 자살을 결심한다.
자살을 하기로 계획한 날, 쇼야는 쇼코를 찾아간다. 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이 명확하게 전달되진 않는다. 쇼야는 자살하지 않았다. 아니 죽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애매한 경계를 넘어 쇼야는 찢어뒀던 달력에 그려진 다음 날짜에 계속 살아간다. 쇼야는 그렇게 자주 쇼코를 찾아간다. 그리고 쇼코의 동생을 만나고 옛 초등학교 친구들, 자신과 쇼코의 동창들을 한 명씩 만나 간다. 잃어버렸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쇼야는 무심하기 짝이 없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쇼야의 무심함은 다만 무심함이 아니라 미숙함이었을 것이다. 항상 티셔츠의 상표를 꺼내고 다니는 소년, 쇼야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에 미숙한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초등학생에게 '평범'을 벗어난 것은 곧 두려움이고 익숙지 않음이다. 우연히 쇼코는 귀가 안 들리고 '이상한' 발음을 하는 '친구'였을 뿐이다. 쇼야를 비롯한 아이들은 미숙했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어떻게 함께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이들은 '당연한 듯이' 쇼코를 멀리했다. 이 평범한 악행들은 불행을 초래했다. 쇼코에게 쏟아졌던 비난의 화살은 쇼코를 교실로부터 밀어냈다. 쇼코가 나가고 나자 화살은 쇼야에게 쏟아졌다. 쇼야는 그렇게 '친구'를 잃는다.
이 영화에는 유난히도 얼굴이 잘린 쇼트들이 많다. 특히 중반부에 중학생이 된 쇼야가 다니는 곳곳마다 모두의 얼굴에 X 표시가 쳐져있고 심지어는 얼굴마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쇼야가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쇼야의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쇼야의 시선은 대부분 이야기하는 상대의 얼굴이 아니라 상대의 몸이나 손, 발에 머무른다. 그는 상대를 도저히 바라볼 수 없다. 이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상대가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또는 내가 상대가 다가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말이다. 그리고 얼굴의 X 표시는 쇼야가 아직 자신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닐까.
<목소리의 형태>는 시선과 인정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부분에 관점을 둔다. 이것이 이 영화가 빚어내는 '형태'이다. 이 영화는 다소 공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이지매', '모욕', '자살'과 같은 문제들 말이다. 이 영화가 청소년의 자살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선택한 이야기는 가장 사사로운 이야기다. 다소 공적인 문제들은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 맥락과 과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답을 넌지시 던지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가 타인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은 상황적 이해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일까.
그는, 쇼야는 다시 잃어버린 것들을 찾을 수 있을까. 쇼야는 잃어버린 '친구'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라는 제목이 힌트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목소리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목소리는 누군가에게 전달되어서야 의미의 형태를 지닌다. 그러나 전달은 언제나 실패한다. 언제나 불완전한 목소리의 형태가 상대에게 가서 닿을 뿐이다. 더군다나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미숙하다. 이런 미숙한 목소리의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먹먹함이 밀려온다. 그래도 <목소리의 형태>는 이 과정을 끝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내 목소리가 상대에게 가서 겨우 닿는 과정을.
* 이 글은 아트나인에 올렸던 리뷰를 일부 수정하여 게재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