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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03. 2021

내 옆집에 난민이 산다면

내 옆집에 난민이 산다면_1.21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읽었다. 제주도 난민 이야기가 나왔다. 작년이었나, 제주도에 난민을 받는 일이 크게 이슈가 됐다. 사람들은 난민의 범죄율이 높아서 불안하기 때문에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난민을 받는건 옳은 일이지만 막상 나에게 난민과 함께 지내라고 하면 멈칫거릴 것 같다고. 내 이웃이 난민이라고 생각해보면 나도 불안할 것 같다고. 인종차별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절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재작년에 호주에서 열리는 APDEC에 갔었다.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갔고 금산의 다른 학교도 참여했다. 열흘이 안되는 시간동안 시드니 외곽 어딘가에서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그동안 나는 한번도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냥 나였고, 우리는 그냥 우리였다.

컨퍼런스가 끝나고 몇일 자유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 자유여행을 기대하며 학교에서 계획을 열심히 짜놓았다. 시드니 시내에서 아름다운 도서관, 미술관, 바닷가를 가보고 엄청난 물가에 기겁하며 밥을 먹었다. 날씨가 몹시 좋았던 그 자유여행동안 나는 처음으로 인종차별을 겪었다.

자유여행 첫날 APDEC이 열렸던 공간에서 나와 시드니 시내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으러가는 길에서 어떤 백인남자가 차를 타고가다가 우리에게 무어라 소리치고는 떠났다. 나는 자세히 못 들었지만 친구들이 말하기로는 인종차별적인 욕이었다고 한다.

한번도 인종으로 소수자였던 적 없이 살아왔던 나는 처음 겪어보는 인종차별이 신기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이상하게 살짝 신나기도했다. 새로운 경험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인종차별을 아주 우습게 알았던 것이다.

몇일뒤 늦은 밤, 버스를 잘못 탄 우리들은 외딴 정거장에서 막차를 기다리고있었다. 추운 길에서 말 그대로 덜덜 떨며 버스를 기다렸다. 주변은 조용했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도로에서 한참을 떨다가 겨우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교통경찰처럼 형광조끼를 입은 아저씨가 있었다. 좀 험악해보이는 모습에 움찔했다. 처음에는 버스에 경비원같은 사람이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내버스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경비원까지?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쳐서 앉아있는데 시끌벅적한 무리가 버스에 탔다. 자기들끼리 아주 왁자지껄하게 떠들고있었다. 나는 처음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여럿이었지만 그들도 여럿이었다. 그들이 하는 말들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우리를 조롱하고 혐오하고 멸시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선생님은 반응하지 말라고했다. 우리는 경비원이 서있는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모여앉았다. 그들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경비원이 뒤쪽으로 가서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경고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큰 목소리로 한번만 더 그러면 버스에서 내리게 할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대답만 잘 할 뿐 소리지르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사실 정말 그들을 내리게 만들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경비원도 알고 그들도 알았다. 그래도 경비원의 존재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소리치고 욕해도 내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경비원 아저씨가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던지.

우리는 정류장에 도착할때까지 거의 아무말도 하지않고 견뎠다. 내 눈앞에는 우리 학교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귀에는 계속 그 사람들이 무어라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억울하고 무서웠다. 내가 재밌고 즐거운 경험을 하려고 호주까지와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다니, 말로만 듣고 영상으로만 보던 인종차별이라는게 정말 존재하고 아주 위협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번도 겪어본적없던 종류의 차별이었다. 눈물이 찔끔났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결국 친구들 품에서 훌쩍였다. 인종차별이 어떤건지 아주 눈물 쏙 빠지게 느낄 수 있었다.  

오직 내 인종만으로 나를 혐오하고 멸시하고 당연한 듯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을 처음 만난 충격은 컸다. 그 중엔 흑인도 있었다. 나는 흑인‘도’ 그 무리에 있다는 것에 놀랐다. 미국에서 흑인이 심한 인종차별을 겪고있는데도 다른 인종을 차별한다는것에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흑인이 소수자고 차별받으니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무것도 몰랐다. 동양인 차별이 더 심하다는것도 몰랐고, 우리나라에서 동남아인을 얼마나 차별하는지 그닥 관심도 없었다. 한번도 소수인종의 위치에 서 본 적 없이 살아왔기에 가질 수 있는 안일함이었다. 내 무의식의 백인우월주의가 아주 선명했다. 참 인종차별주의자다웠다.

그 다음날에도 인종차별을 겪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열려있는 창문 넘어로 웬 백인할아버지가 길을 가다 멈춰서서 아니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불편하고 억울한 마음이 속을 긁었다. 친구가 말했다. 무시해. 나는 눈을 피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날 길을 걷다 아름다운 도서관을 우연히 발견했다. 도서관에는 작은 박물관과 초상화를 전시해둔 미술관도 있었다. 어쩌다 우리끼리 폭소가 터졌다. 도서관 관리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눈을 부라렸다. 우리는 황급히 목소리를 죽였지만 너무 웃긴 나머지 키득대는걸 멈출수가 없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저 사람이 우리를 단지 ‘예의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의없는 동양인들’로 보면 어떡하지? 우리가 잘못한건 맞지만 그게 우리가 동양인이기 때문은 아닌데. 혹여나 내가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준건가. 조금 심란해진 마음으로 건물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하루인가 이틀전에 우리집으로 엽서를 부쳤다. 우리가족만의 해외여행 기념방식이었다. 여행지에서 산 엽서를 해외우편으로 집으로 부치면 그 나라의 우체국 도장이 땅 찍혀서 집에 도착한다. 그 엽서를 기념품으로 간직하곤 했다.

나는 엽서를 부치러 아침에 혼자 숙소를 나섰다. 가까워서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고 요즘 아주 발전한 핸드폰 번역기로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걱정했던 길을 잃는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나가는 호주인들이 무서웠다. 나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의식하며 걷고있었다.

우체국에 도착하니까 외국인이 나밖에 없었다. 관광하러 오는 곳도 아닌데 의아하다는 눈빛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식은땀을 흘려가며 별로 친절하지 않은 직원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애써 설명했다. 잘 된건지 이렇게 하는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빨리 돌아가고싶었다.

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혼자 왔을까 후회를 거듭하는데, 순간 누가 내 옷깃을 콱 잡아당겼다. 오만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어떤 백인 할아버지가 찡그린 표정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내가 떨어트린 지폐였다. 순간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이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말을 끝까지 하지도 못했다. 웅얼거리며 지폐를 주운 후 짧은 시간동안 나는 고민했다. 다시 영어로 땡큐라고 해야 하나,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었을 것은 분명한데, 이 할아버지가 나를 도와준건 맞나, 왜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볼까, 왜 그렇게 세게 잡아당긴걸까,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들이 머리를 하얗게 물들였다. 눈앞도 하얘지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다 도망치듯 우체국을 빠져나왔다. 빠른걸음으로 숙소 앞 익숙한 길목에 들어섰을때야 심장이 몹시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짧은 몇일 사이에 인종차별을 겪고 온 신경이 곤두세워져있었다. 누군가 내게 해코지를 할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고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아시아인이고 동양인이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밥을 먹을때도 쇼핑을 할 때도 무언가 구경할때도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이 나라의 보통 혹은 일반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 모습과 행동이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킬까봐 전전긍긍했고 내 모습이 내게 불이익을 줄까봐 걱정스러웠다.

그랬던 내가 제주도의 난민들이 정말 내 주위에 산다면 불안할 것 같다는 말을, 함께 못 지내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절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종차별은 정말 잘못된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종차별을 이해하고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순적이기 짝이 없으면서 내가 모순적이라는것도 몰랐다.

어디 서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것도 달라진다고 한다. 나의 홈그라운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인종차별을 당하는 동양인에서 인종차별을 하는 기득권으로 돌아왔다. 호주에서 동양인은 이렇고 저렇기 때문에 이웃으로 지내기엔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몹시 분노했을텐데. 그 말에 동의하고 있던 한국의 나는 호주에서 나를 노려보던 백인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제주도의 난민들은 호주에서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나를 차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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