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환상
오늘 서평 할 책은 읽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던 책입니다. 1,2권으로 나누어진 분량도 대단했지만 책의 문장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웃긴 것은 그 만연체 문장들을 큰 생각 없이 글자 그대로 읽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책의 세상 속에 푹 빠져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재밌는 경험을 해준 오늘의 책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책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라는 소설입니다. 이 책은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을 세운 부엔디아 가문의 7대에 걸친 흥망성쇠를 다루었습니다. 전 세계 문학사에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우며 인간의 운명과 고독에 대한 가장 장대하고도 슬픈 농담을 던집니다.
소설을 펼치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콘도라는 마을이 지도에도 없는 정글 속 깊은 곳에 신기루처럼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남아메리가의 어딘가에 정말로 있는 듯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빨래를 널다가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고 불면증 전염병이 돌아 마을 전체가 기억을 잃어가며, 죽은 집시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 기상천외한 일들을 마치 "어제 비가 왔다"는 사실을 말하듯 너무나 담담하고 천연덕스럽게 서술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있는 것들에 대한 묘사는 정반대입니다. 얼음을 처음 본 순간이나 자석의 원리에 놀라는 모습은 마치 마법을 본 듯 경이롭게 묘사되죠. 이 표현의 역설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이 얼마나 마법 같은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환상'이라 치부하는 것들이 남미의 역사 속에서는 뼈아픈 현실이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책의 또 다른 진입 장벽은 수없이 반복되는 이름들입니다. '호세 아르카디오', '아우렐리아노'.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그 아들이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같은 이름을 물려주며 독자를 미궁 속에 빠뜨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의 불친절함 아닙니다. 이름의 반복은 곧 '운명의 반복'을 상징합니다. 호세 아르카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들은 충동적이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아우렐리아노들은 내성적이고 지독한 고독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7대에 걸쳐 사랑하고, 싸우고, 혁명을 일으키고, 부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정한 소통에 이르지 못한 채 각자의 고독 속에 쓰러집니다. 부엔디 가문 전체를 지배하는 이 지독한 고독은 타인과 진정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만 침잠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은 한 가문의 몰락만을 그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식민 지배와 독재, 내전으로 얼룩진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이자 망각과 반복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 전체에 대한 거대한 묘사입니다. 책을 덮고 나면 현기증이 날 만큼 방대한 서사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한 쓸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들에게는 사랑을 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독이라는 뼈아픈 낙인을 찍고 나온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