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타 사케&온천 투어 3일차
쿠사츠 온천마을의 밤을 즐기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일본 내국인 관광객들이 꽤 많이 찾는 곳인데도, 저녁 영업을 하는 술집들은 쉽게 찾기 힘들었다.
불켜진 선술집을 찾아 이곳 저곳 골목을 거닐던 중 작은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반가운 불빛을 마주한다. 삼삼오오 모여앉은 이들의 소박한 모습이 로컬 맛집이란 느낌에 자신있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게 주인인 듯한 초로의 아주머니보다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이방인을 맞이하는 취객들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도 전혀 통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의 동네 술집. 다행히 일행 중 일본어에 능숙한 친구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술 몇잔과 안주 몇가지를 주문했다.
바쁜 주인 아주머니 대신, 바에 앉아있던 아저씨 한명이 대신 술잔을 나르는데. 어이쿠 얼큰하게 취한 몸짓이 살짝 위태위태하다.
주문한 안주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더니, 이윽고 내 옆자리에 걸터앉는다. 언어는 안통해도 표정으로 알겠다. 자신은 이곳의 단골손님이고, 이 집의 안주는 정말 싸고 맛있다... 등등
말도 안통하는 낯선 외국인도 '에브리바디 프렌즈'가 되는게 여행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 마음의 빗장을 풀고 한걸음 더 다가갈수록 여행의 맛은 더 깊어지는 법이다.
한데 이 아저씨, 살짝 선을 넘는다. 내 무릎에 팔을 기대고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아주머니가 그만 좀 하라는 눈치를 주고서야 마지못해 제자리로 돌아간다.
일상의 술자리였으면 불쾌했을 수 있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쿠사츠의 밤이니깐. 에브리씽 이스 오케이!
사흘째 아침, 애초 계획은 원숭이 온천을 들러 마지막 여정인 아카쿠라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일행들 모두 굳이 원숭이가 온천하는걸 보러 가고싶진 않다고. 쿠사츠에서 오후까지 여유있게 마을을 거닐기로 결정. 고재열 여행감독이 이끄는 여행은 이런게 좋다. 언제든 바뀔수 있는 자유로운 여정.
여행지에서 불쑥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은 예고없이 날아온 선물처럼 느껴진다. 어딘가 한 곳을 포기해서 생긴 것이지만, 뜻하지 않던 자유가 주어진 것만으로 기분이 썩 좋다.
쿠사츠에서의 선물같은 시간의 첫 조각은 쿠사츠의 전통 문화와 춤을 보여주는 유모미 체험 공연. 사실 공연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할 정도로 단순하다.
50도가 넘는 온천물에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어, 예전에는 쿠사츠의 여성들이 탕 한쪽에서 노처럼 생긴 막대로 물을 휘저었다고 한다. 그 풍습을 재현하는 작은 극장 쇼인데, 통역없이 일본어로만 긴 설명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춤 동작도 단순한 몸짓이 반복되다가 마지막에 한번 살짝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는데. 7백엔의 입장료가 살짝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쿠사츠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유바타케도 같은 이유로 만들어졌다는데, 기다랗게 이어진 나무 수로를 따라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내려오는 온천수가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볼만하다.
온천수를 식히는 한편, 유황물에서 쌓인 잔여물로 입욕제를 만들기도 한다고.
쿠사츠 온천은 1100년대부터 개발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는데, 이 뜨거운 온천물의 원수가 흘러 내려오는 쪽빛 계곡을 거슬러오르는 산책길이 내겐 훨씬 매력적이었다.
아, 온천수도 이번에 방문한 유자와, 쿠사츠, 아카쿠라 세곳 중 이곳 쿠사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유황 성분이 많고 산도가 강해서, 온천욕을 하고 나오면 입가에 쌉싸름하고 시큼한 기운이 한참을 머물 정도.
그리고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내국인들이라서인지 카드가 전혀 안되는 식당들이 많으니, 쿠사츠를 찾을 땐 현금을 소지하는게 좋겠다.
이제 이번 여정의 마지막인 아카쿠라 온천으로 향했다.
아카쿠라는 니카타현 묘코시 주변에 있는 일곱개의 온천마을 중 하나인데. 유자와보다 더 많은 눈이 쌓여있는데다 산 아래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호텔까지 버스 진입이 어려워 소형 차량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번 여정 중 가장 작은 마을이고, 한국인들에겐 거의 알려져있지 않은 곳인데. 특이한 건 거리나 상점에 일본인들보다 서양인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스키를 즐기는 외국인들이 찾았다가 조용한 이 마을의 매력에 빠져 몇달씩 또는 몇년씩 눌러앉는 곳이라고 한다.
어스름이 짙어가는 저녁에 도착, 다음날 아침이면 떠나야 하는 일정이라, 이 조용한 마을의 매력을 천천히 두 눈에 담지 못하는 아쉬움을 술로 달랬다.
치앙라이나 빠이 쯤 되는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푸른 눈의 이방인들이 가득한 일본의 작은 온천 마을 펍에서, 또 다른 여정에서 만날 인연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