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글쟁이, 그녀를 응원합니다_ 박도 작가 3편
박도 작가와의 '나만의 서재'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가 되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이제 막 시작한 듯싶다.
그리 길지 않았던 몇 주,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나는
‘찌질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누군가가 찌질하다고 표현하면 그 상대방이 뭔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나 또한 왜 하고 많은 단어 중에 자신을 표현하는 말로 "찌질함"을 선택했을까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을 찌질하다고 부를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용기이고 솔직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인지 배웠다. 이번 3편은 박도 작가가 정성껏 정리해서 보내준 공간과 책 그리고 자신의 인생 책에 대한 글로 마무리해볼까 한다.
공간에 대해서
나에게 공간은 내가 나일 수 있는
세모난 하숙방이었다
대학생 때 살던 하숙방은 맨 꼭대기에 있었다. 아래층에는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았는데 내 방에 올라가려면 집 안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이층 집에 사는 느낌이라 좋았지만 할아버지가 웃통을 벗고 있다거나 아들 가족이 놀러 오면 다들 팬티바람으로 거실에서 자는 터에 되도록 계단만 보고 걸었다.
그럼에도 그 집을 좋아했던 건 세모난 지붕과 비정상적으로 길었던 방의 구조 때문이었다. 네 개나 되는 창문을 다 열고 침대에 누워 새소리를 들었던 날, 서울에서 내 몸 하나 누울 곳만 있으면 된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세 들어 살긴 해도 내가 살던 작은 방들마다 넘치는 애정을 주었다. 머지않아 떠난다는 걸 알면서도 다이소에 가서 5천 원짜리 시계, 거울, 메모보드 등을 사서 방을 꾸몄고 잡지에서 오려낸 연예인 사진이나 여행지의 풍경을 덕지덕지 붙이곤 했다. 내 손이 탄 공간은 비로소 내 집이 된다.
과거를 돌아볼 때 그때의 공간들까지 함께 떠오르는 걸 보면 나는 공간들과 함께 어른이 되어왔는지도 모르겠다. 1평 남짓한 나의 숨통, 나의 공간, 나의 집.
책에 대하여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다른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유일한 대화창구이기도 했다.
나에게 책을 읽는 행위는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내 책을 쓰게 되었을 때도, 누군가 나를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내 인생을 끌고 온 건 특히 소설책이다. 초등학생 때 읽었던 소설 ‘산적의 딸 로냐’는 많은 걸 잊고 사는 나에게 아직까지 선명한 것 중 하나다.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머릿속에는 책 표지에 있던 로냐가 악당과 싸우는 장면이 그려졌고, 아빠의 원수지간 집안의 아들, 비르크와 우정을 나눌 땐 나도 그들의 친구가 된 것처럼 마음이 뭉클해졌다. 소설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된 거다.
소설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현실 도피이기도 했다. '집-학교-학원-집'으로 반복되던 일상, 그리 화목하지 않은 가정, 친구들 사이에 완전히 끼지 못한 외로운 학창 시절은 언제나 벗어나고 싶었던 버거움이었다. 혼자서 길을 걷는 시간을 좋아했던 아이에게 소설은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자 희망이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다른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유일한 대화창 구이기도 했다. 종이에 써 있는 글씨는 순식간에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책이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시간을 믿는다. 더는 상대방에게 기대하지 않게 될 때 사랑도 끝이 난다는 말을 들어봤다면, 내가 소설책을 펼칠 때 이토록 거대한 기대를 하는 이유가 그 깊은 사랑 때문임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책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많이 찌질한 사람이니까. 그 대신 책이 사람을 꿈꾸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책을 발견하고, 읽고, 만드는 사람으로 오랫동안 존재하기를 바란다.
나의 인생 책 두권
1.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내던져졌을 때, 아무도 어른의 삶을 가르쳐주지 않아 지독히 외로웠을 때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소설을 만났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어른의 인생을 담은 에세이 같기도, 언어학과 철학을 버무린 전문서적 같기도 해서 읽는 동안에도 한참을 생각하고 고민했던 기억이다. 책이 이끄는 대로 한동안 멀고 먼 다른 세계에 발을 담그고 살았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에 대해서, 삶에 태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책.
2. <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나의 취향의 책 <로베르 인명사전>은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책 중 하나다.
고등학생 때 도서관에서 민트색 유광 하드커버의 <로베르 인명사전> 소설을 발견하고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충격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뇌리에 박힌 강력하고도 잔인한 이미지들 때문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19살에 임신, 결혼, 살인, 자살. 도입부부터 압도적으로 독자를 매료하는 이 소설은 청소년이 읽기에 다소 잔인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느끼는 데에 아이와 어른의 구분은 모호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비슷한 슬픔을 느끼는 걸 보면 나는 그 책을 읽기에 부적합한 나이는 아니었다.
책에 나온 비극에 어렴풋이 공감했고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의 인생이 궁금해진 건 처음이었다. 지금처럼 많은 정보가 들어있지 않았던 느린 인터넷을 붙잡고 아멜리 노통브라는 젊은 프랑스 여성작가를 알아갔다.
‘나도 이런 글을 써야겠어’라고 확신을 가진 건 아니지만, 이야기를 만들거나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건 분명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회사를 위한 글을 쓰며, 퇴근 후 나의 글을 쓰면서 버티는 삶을 살아내고 있으니 아멜리 노통브에게 고마워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