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손님이 처음인가요 달리면 어디가 나오죠
두렵지만 그래도 이렇게 공항에 계속 서있을 순 없지 않은가. 용기를 내어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고장 난 바퀴 때문인지, 밤낮이 바뀐 시차 때문인지 한껏 마음이 상한 이민 가방이 자꾸 안 가겠다고 버틴다.
야 이러지 마, 나도 가기 싫어. 우리 그냥 같이 울어버릴까.
일단 가장 착해 보이는 운전자를 찾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택시들을 살펴봤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불도 켜지 않고 일렬로 서있는 옐로 택시 안 피곤에 전 사람들. 이 사이에서 '착함'이란 세상에 없는 단어임을 바로 깨닫는다. 일단 덜 무서워 보이는 사람의 택시를 골랐다. 나름 사람 관상 잘 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인 얼굴만 가능했었나 보다. 혼자서 그 성난 이민가방을 트렁크에 쑤셔 넣고 앉았더니 나를 쓱 쳐다본다.
"Do you know where you are going?"
좋은 질문이다. 물론 이때 이 기사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정말 한마디도 못 알아들은 것 같다. 한국에서 나름 영어공부라면 자신 있던 나인데 충격적으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Reading과 Writing만 죽도록 파던 전형적인 실패한 영어교육의 결과물, 그게 바로 나였다. 대충 느낌으로 어디 가느냐고 묻는 거 같다. 내 손엔 한국에서 적어온 호스텔 주소가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
우리 인생에선 때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어쩌면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준 그 시작은 이 주소를 나에게 준 그 사람에게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때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3일 전.
걱정하는 티를 내면 못 가게 할까 봐 괜찮다고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렸지만 내심 나도 불안했었나 보다. '한인민박' '한인숙소' 아무리 찾아도 어쩜 하나도 안 나온다. 저 해저 밑으로 잠수해버린 그 친척분, 그분이 사는 곳 근처 어학원은 한국인이 그렇게 많이 찾지 않는 Maryland의 어느 작은 타운에 있는 곳이었다. 출발 전날 우연히 글 하나를 발견했다. 한국인 아주머니가 남는 방하나를 내놓는다는 글. 너무 반가워서 날짜를 보니 벌써 4개월도 지난 글이다. 그래도 3일 내내 찾아서 나온 건 이거 하나인데 메일이라도 보내볼까?
"이미 출발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이 주소로 찾아오세요."
영혼의 간절함까지 담아서 쓴 메일. 하지만 예상처럼 답장은 출발 전날까지 오지 않았다.
아마도 중간에 경유하는 곳에서였던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일을 열어보니 답장이 와있었다! 그것도 메일이 2통이나 와있었다.
생각보다 장문의 글이었다. 자기는 집주인이 아니라 그 집에서 하숙하다가 4개월 전에 이사 나온 사람이라고 했다. 주인아주머니의 부탁으로 글을 올린 건데 사실 오래돼서 방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나갔다고. 자기도 여기 온 지 몇 년 안됐는데, 나처럼 아무 계획 없이 용감하게(?) 오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대안으로 마련했던 호스텔 정말 위험한 곳이니 절대 가지 말라고. 바로 두 번째 메일을 열어봤다. 자기가 그 하숙집 아주머니랑 통화했는데 일단 사정이 급한 것 같으니까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는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한인 가톨릭 교회에서 모임을 운영하시는 분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나보다 더 다급해 보이는 말투였다. 그리고 마치 친언니가 쓴 글 같은 그런 따듯함이 있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맨땅에 헤딩하려는 스무 살 갓 넘은 동생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런 말투가 묻어났다.
"일단 그냥 한번 가봐?"
사진 몇 장만 봤던 그 허름해 보이는 호스텔보단 나를 걱정해주는 말투의 누군가가 다급히 알려준 집 주소 하나가 차라리 더 믿을만해 보였다. 그나저나 누가 접착제를 붙여놨는지 주소를 불러줘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종이를 건너면서 말했다. "Here please" (나름 말끝에 Please 붙이라는 건 용케 기억했나 보다.)
어라, 생각보다 좀 머네?
30분, 40분, 한 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나, 대체 어디로 가고있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