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_시작은 이랬어

무모하다 못해 무지했던 나의 처음

by 지금은 디자이너


"너 미국 가볼래?"


이 말을 들은 나는 또 아빠가 술 한잔 거하게 하고 오셨구나 싶었다. 다음날이면 기억도 못하실 수많은 '아빠의 희망사항' 레퍼토리 중 하나겠지.


"당연하죠! 보내만 주세요."


이렇게 시작됐다. 평생 살면서 미국이란 나라에 갈 생각은 1도 안 해본 내 운명이 바뀐 그 결정이 이렇게 쉬웠다. 참 평범했던 우리 집에서 외국으로 자식을 보내 공부시킨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 대화가 오고 난 뒤 정확히 3달 뒤 나는 이민가방을 싸고 있었다.




사건의 내막은 아빠의 친척 여동생이었다. 미국에 가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고 말로만 듣던 그분. 30년 전쯤 이민 가기 전 아빠에게 진 빚을 갚겠다고 막내인 나를 잠시 자기에게 보내서 공부시키라는 뜻밖의 제의를 했단다. 이게 웬 횡재인가, 나는 어학원을 알아보고 운전도 해야 한다는 말에 한 달 반 만에 초고속으로 면허까지 땄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나의 이야기는 그저 흔한 유학생 어학연수 정도였으리라.


"야야, 거 니 사촌언니가 전화를 안 받는다?"


내가 떠나기로 예정한 날 일주일 전쯤인가, 그쯤부터 연락이 안 되는 그분. 에이, 잠시 바쁜 거겠지..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꾸 넘실넘실 올라오는 불안감.


그렇다. 결국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빠는 분노와 실망감, 그리고 나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모두 섞인 얼굴로 말하셨다. "아빠가 꼭 다시 보내줄게. 이번엔 그냥 비행기표 취소하고 없던 일로 하자.. 아빠가 미안하다"


2007년 10월 밤공기가 꽤 차가웠던 그 저녁. 난 무얼 믿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았다. 무모하지만 미국도 사람 사는 곳인데 나 하나 도와줄 사람 없겠어? 이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물론 지금은 안면도 없는 동양인을 그냥 도와줄 사람은 미국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고집 센 내가 우기는데 엄마 아빠라고 별수가 없었겠지. 그렇게 나는 그냥 아무 계획도 없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참, 나름 계획은 있었다. 어학원 근처 호스텔 번호와 주소 정도는 챙겨뒀으니.


"딱 3개월만 있다가 올게요!"


3개월만 있다 온다는 애가 자기 덩치만 한 이민가방은 왜 들고 간 건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그렇게 무모하게, 그리고 무지와 함께 시작된 나의 미국 생활이 벌써 햇수로 14년째이다. 가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 있다. 내게는 그날 밤이 그렇다.


밤 11시가 지난 텅 빈 공항.

차가운 공기와 낯선 냄새.

고장 난 바퀴 때문에 더 무거워져 버린 그 이민가방의 무게.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 차려보니, 나는 워싱턴 디씨의 텅 빈 공항 어디 구석에 서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보다 두배는 커 보이는 친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공항 직원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간다. 자, 정신을 차려보자. 이제 어디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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