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마카로니와 멸치볶음

낯설지만 싫지않은.

by 지금은 디자이너


모든 게 신기한 여기가 미국이란 곳인가?


낯섦. 어색함.


이런 감정들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별세상에 온 듯 모든 게 뒤바뀌어버린 나의 일상. 아침에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들리던 엄마가 틀어놓던 라디오 속 디제이 목소리가 아닌 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꽤 멋있게 들리는 미국 앵커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소박해도 밑반찬 3, 4개는 올라가던 밥상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다. 교포 언니가 만든 마카로니는 내가 알던 그 마카로니 샐러드가 아니다. 노란 치즈가 꾸덕꾸덕하게 녹아 있는 미국식 마카로니 옆에 반갑고도 익숙한 게 보인다. 소방관 아저씨가 한국마트까지 멀리 가서 사 오신 귀한 멸치볶음. 주인아주머니가 끓여주신 이름 모를 국과 함께, 그렇게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나의 미국 생활.


낯설지만 싫지 않아.


처음에 미국에 가서 가장 재미있었던 게 뭐야? 누가 묻는다면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할 수 있다.

마. 트. 구·경.

내가 처음 간 곳은 메릴랜드 중에서도 한국인이 거의 살지 않는 그런 조용한 백인마을이었다. 동양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매일같이 마트에 가서 몇 시간씩 구경하는 동양 여자애. 지금 생각해보니 참 이상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깟 슈퍼 처음 간 걸로 왜 그렇게 설레발을 치고 신났는지 의문이다. 요리를 좋아해서 난생 처음 보는 과일 구경, 야채 구경도 너무 신나고 끝을 모르고 가득 채워져 있는 시리얼들의 향연도 나에겐 참 별세상이었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음식. 이 모든 게 낯설지만 싫지는 않다.


영어를 하는데 왜 일본어처럼 들리지?


처음 어학원을 등록하고 수업을 들으니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많은 사람이 보인다. 그래도 다행히 며칠이 지나니 접착제를 붙여놓은 것같이 떨어지지 않던 나의 입에서 영어라고 추정되는 말들이 조금씩 나온다. 물론 유창함과는 거리가 먼 그냥 알파벳을 합친 그런 말 정도 수준인 것 같다. 그러면 어떤가. 같은 반 친구들이라고 딱히 다르진 않다. 분명히 다들 영어를 하는데 엑센트 때문인지 정체불명의 언어처럼 들린다. 특히나 일본에서 왔다는 한 친구가 하는 영어는 너무나도 일본어처럼 들려서 내가 알아듣고 대답하면 순간 일본어를 알아들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어떠냐. 난생처음 만나본 다른 나라 친구들과 손발 썩어서 웃고 떠드는 이 모든 게 신기하고 또 신기하다.


한국인과는 말하지 않겠어!


유학 생활을 하면 외로운 마음에 한국 친구들과 당연히 어울리고 서로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영어를 꼭 잘해야겠다는 강박관념 같은걸 심어주는 몇 번의 에피소드가 일어난다. '영어 때문에 일어난 굴욕적인 사건'이라는 주제로만 책 한 권쯤은 거뜬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영어와 나의 애증의 관계는 2020년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20살이 넘어서 온 내가 이렇게 미국이란 곳에서 살아남고 인정받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건 어학연수 초반 나에게 일어난 몇 번의 사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중 가장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날의 사건.


"You, stupid!"


항상 평소처럼 어학원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돈을 내고 자리에 가서 앉으려는데 누가 나를 부르는 듯 하다. 뭐라고 말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하는 중년쯤 돼 보이는 흑인 버스 기사. 대충 손짓으로 보니 돈을 넣으라는 것 같은데 나 이미 돈 냈어. 라는 말이 입에서 안 나온다. I did! I did! 아마도 이 말만 무한 반복했던 듯. 일진이 나빴던 건지 아니면 돈 낸 척하고 그냥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건지, 이 아줌마 나에게 화풀이가 끝나지 않는다. 우연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고마운 일들이다. 이때 이런 작고 큰 사건들이 없었다면 나도 안일하게 한국 유학생들과 어울리고 외로움을 달래면서 지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영어를 못 하면 나는 이 나라에서 계속 약자겠구나. 나의 영어의 흑역사를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은 이 깨달음과 함께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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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시작하는 디자이너 도전기를 위해서 어학연수 이야기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짧게 기록하고 지나갈 예정이에요. 공감가는 내용이 있다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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