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n_grow 첫 번째 책 이야기
나의 'H마트'를 건드리지 말라
이 책을 소셜 미디어에서 본건 꽤 오래됐다. 영어판의 제목이 더 자주 보였는데 'Crying in H Mart'라고 적힌 검은색 글씨와 빨간 책 표지가 눈에 확 띄었다. '뉴욕 타임스 29주 이상 베스트셀러', '버락 오바마 추천도서'라는 화려한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대충의 줄거리를 보니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작가가 엄마의 죽음을 겪으며, 엄마가 남겨준 음식과 문화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엄마와의 이별의 슬픔을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나왔다.
미국에서 생활한 지 오래된 나에게 이런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 중에 한국에서 아주 갓난아기 때 이민온 친구들도 많았고, 혼혈 친구들도 적지 않아서, 그들의 이야기와 그녀의 이야기가 얼마나 다를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또한 나의 이유 없는 반감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책 제목에 나온 'H마트'라는 단어였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마트가 주는 의미가 매우 크다는 것을 공감할 것이다. 한국 음식을 먹고 자라온 사람에게는 한국음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을 채워주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고, 그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식재료를 파는 곳이 H마트인 것이다. 가끔 소개글에는 아시아 음식을 파는 식료점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이 운영하고 한국음식을 주로 취급하는 미국 최대의 한인 슈퍼마켓이다.
‘그래봤자 그냥 슈퍼마켓 아니야?’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을 떠나 타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나라의 음식을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든든한 것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한국음식을 직접 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에게 영혼의 안식처 같은 'H마트'를 언급한 책이 이유 없이 탐탁지 않았고, 나는 그저 유명한 베스트셀러로만 알고 그냥 지나쳤다.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그러던 중 우연히 내가 이용하는 독서앱에 이 책의 오디오북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드라이브하는 걸 즐기는데 마침 저장해 준 책이 모두 떨어졌던 참이었다. '그래, 뭐 엄청 유명하다는데 들어나 보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총 21장의 열 시간이 넘는 분량이었지만, 한번 시작한 뒤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강아지 산책 시킬 때도, 청소할 때도, 요리할 때도, 계속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버렸다. 전문 작가가 아니라고 하는데 어찌나 글을 흡입력 있고 힘 있게 끌어가는지, 듣는 내내 놀라웠다. 또한 생생하면서도 섬세한 표현력으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작가의 글솜씨에 감탄했다.
이 책은 어찌 보면 조금은 전형적인 엄마와 딸의 이야기이다. 유난히도 엄격하던 한국인 엄마의 아래에서 자기주장이 강하고 개성이 넘치던 딸은 통제를 견디지 못했다. 엄마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심한 방황을 하던 십 대 시절 엄마와 갈등을 겪고 사이가 멀어지고 만다. 작가가 25살이 되던 해, 둘의 사이가 조금 부드러워지고, 엄마도 예술가로 살아가려는 딸을 받아들이려던 그때, 엄마는 말기 암 선고를 받는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작가가 암 투병을 하는 엄마 옆에서 함께 지내던 6개월 정도 동안 겪은 경험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뻔할 것 같은 내용이지만, 그 안의 작가의 놀라울 만큼 솔직하면서도 디테일하게 풀어내는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니 공감은 되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나 암투병의 마지막 단계를 표현한 부분은 정말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잠시 오디오북을 멈추고 감정을 정리하고 들어야 할 정도였다. 최근 가족의 투병이나 아픔을 겪고 있다면, 이 부분을 읽는 것조차도 버거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책의 어느 부분에 작가가 이렇게 표현했다. 만일 세상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면, 하나는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또 하나는 앞으로 그 고통을 겪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나는 이것을 가족을 잃는 슬픔이라고 해석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작가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바닥까지 내몰려 가서 모두의 영혼까지 부숴버리는 가슴 아픈 이별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남긴 기억과 사랑, 그리고 음식을 통해 전해준 자신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통해 아픔을 치유해 나가는 작가의 여정은 아름다웠다.
가슴 깊이 사랑한다는 것
이 책의 큰 부분은 한국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엄마들처럼 작가의 엄마도 음식을 통해 딸에게 사랑을 표현했다. 작가는 엄마가 떠난 뒤에 텅 빈 마음을 엄마가 해주던 한국음식을 배우면서 채워나간다. 한국인 보다 더 정확하고 세세하게 한국음식을 표현하는 그녀의 책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지키려 노력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은 어떤 하나의 대상을 아주 깊게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했다. 작가가 엄마에 대해 그토록 자세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엄마와 나눈 추억 하나하나, 엄마의 취향, 엄마의 흔적들까지. 살면서 누군가를 이토록 깊게 사랑하는 경험은 어쩌면 축복이 아닐까 싶다. 비록 엄마가 떠난 뒤에서야 깨닫게 되어 마음 아픈 사랑이지만, 그래도 엄마와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녀 또한 무한한 사랑과 지지를 받았음을 알게 되고 스스로를 치유해 나간다.
엄마가 떠난 뒤 작가가 잣죽을 끓여 먹으려는 부분이 나온다. 엄마는 이미 떠난 후이기에, 유튜브를 찾아서 레시피를 보고 따라 한다. 그 부분을 읽은 뒤, 나도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받아주는 엄마가 새삼스레 고마웠다. 작가와 엄마만큼은 아니어도, 나와 엄마의 관계도 사랑하지만 또 그래서 너무 가까워지고, 의도치 않게 상처 주는 그런 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전화를 걸어 "엄마, 나 이거 먹고 싶어서 그러는데, 어떻게 만드는 거였지?"하고 물을 수 있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하다.
아빠가 쓰러지신 뒤, 우리는 매일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지금 이 통화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음을.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친절하게 말하고 더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려 노력한다. 요즘 엄마와 전화를 끊을 때 우리가 종종 하는 말이 있다.
"딸내미! 잘 먹고 잘살아!"
"응, 엄마도!
잘 먹고 잘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