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일기 5 그래도 건사료는 살찐다
건사료는 수분이 적어 부피 대비 칼로리가 매우 높고,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 살이 찔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잊을 만하면 수의사나 영양학 전문가가 건사료를 건빵, 시리얼, 물 없는 전투식량, 생라면 등으로 강하게 비유하여 건사료를 급여하는 보호자로부터 원성을 듣기도 한다. 그냥 평범하게 건사료를 사서 평범하게 부어주었을 뿐인데 그게 고양이가 살이 찌도록 만든 원인이라니, 건사료만 생각하면 억울함을 감출 수가 없다.
억울함과 지난 역사는 병원비로 갚기로 하고 이번에는 내가 건사료를 급여하면서 고양이 비만 위험을 낮추려고 했던 시도를 되짚어보기로 한다. 수년 동안 '파이와 스프는 건사료만 먹어서 어쩔 수 없어요'를 달고 살며 나름대로 공부하고 시행착오를 거친 부분이 많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실은 고양이가 건사료만 고집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건사료를 주고 싶은 것에 가까웠다. 그게 편한 것 같으니까. 사료를 구입하고 차려주는 주체면서 책임감을 고양이 입맛에 떠넘기고 합리화하기 바빴다.
습식이 더 좋은 건 알지만 건사료 급여는 집마다 상황이 달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속이며 변명했었다. 그리고 나는 건사료에 대해 굉장히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여 차선책을 찾아 나가니 개중에 나은 사람이라고 자부하기까지 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 파이와 스프는 차려준 주식캔이나 생식을 순식간에 흡입하는 고양이가 되었다. 내가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 아니 않았을 뿐이지 우리 집 고양이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시판 건사료를 비판하는 집단을 주류 의견과 과학을 무시하려 드는 '안아키'와 다름없다며 폄하하는 사람을 보면 생각한다.
'그래도 건사료는 살찐다.'
모든 고양이 건사료가 살이 찌는 것은 아닐 거야! 당시 나는 고양이 살이 찌지 않는 유니콘 사료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이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내가 사료를 찾아다니며 거친 단계를 3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당연히 건사료를 찾는 와중에 틈틈이 습식사료를 사서 안 먹는다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것은 옵션이다. 2020년 기준 나는 수년간 총 147개의 습식사료(간식 포함)를 까서 고양이에게 급여해보았다. 브랜드 라인 별로 기록한 것이니 맛 별로 세어보면 더 많을 것이다.
자랑은 아니다. 기호성 테스트는 결코 좋은 방법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고양이의 입맛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그저 우리 고양이가 습식을 잘 안 먹는다는 핑계를 돈으로 열심히 사 모으고 있었다.
사료 회사도 바보는 아니다. 소비자더러 이런 제품을 사야 한다고 설득하면서도 소비자의 요구를 맞추는 시늉은 해야 한다. 로얄캐닌에서 2020년 의뢰한 '반려동물 현황 및 건강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전체 고양이 보호자 중 30%가 고양이 건강관리 중 가장 우려하고 있는 부분이 '비만'이라고 답했다. 참고 1)
이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각종 사료 회사는 체중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사료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수의사를 고용하여 '뚱냥이 영양 상담'을 진행하고 체중관리 비법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너희 때문에 살찐 건데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을 따라가 보았다.
참고 1) 집사들 최대 걱정거리는?… ‘비만’, 또 ‘비만’, 코코타임즈 https://cocotimes.kr/2020/02/05/%EC%A7%91%EC%82%AC%EB%93%A4-%EC%B5%9C%EA%B3%A0-%EA%B1%B1%EC%A0%95%EA%B1%B0%EB%A6%AC%EB%8A%94-%EC%82%AC%EB%9E%8C%EC%9D%B4%EB%82%98-%EA%B3%A0%EC%96%91%EC%9D%B4%EB%82%98-%EB%B9%84%EB%A7%8C/
체중관리를 목적으로 한 다이어트 사료는 시중에 그득하다. 실내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는 일반 건사료를 먹으면 살이 찌니 이들의 체중관리를 위해 '인도어' 사료를 먹어야 한다고 파는 게 기본이 됐다. 불임수술을 하고 난 뒤에도 살이 찌기 쉽다며 성묘 연령대를 위한 사료를 따로 팔았다.
원래도 체중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사료(인도어)였는데 이를 주다가 살이 찌면 '진짜 체중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사료'(다이어트 사료)를 찾는 구조였다.
당시 고양이 살을 빼려고 쇼핑몰에 수시로 들어가 다이어트 사료를 검색해보며 라벨을 읽어본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부분이 일반 사료와 달라서 체중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제품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부분이 있고 효능이 있다면 그 부분을 감출 리가 절대 없고 쩌렁쩌렁하게 홍보할 텐데 대부분의 다이어트 사료는 설명이 텅 비어 있었다.
칼로리라도 적어주면 양반이었고 제대로 된 전성분과 성분 함량 표기조차 불량했다. 이거 사기 아니야? 다이어트 사료는 인간 의약외품이 아니어서 그냥 팔 수 있었나 보다. 아무렴 인간 다이어트 음식도 검증 안 된 불량한 제품이 판을 치는데 동물 제품에서 정직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한 게 잘못 같기도 하다. 고양이 살을 빼고는 싶지만 그러기 위해 사료의 칼로리와 탄수화물 비중 등을 매번 직접 계산하고 고려해서 급여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사료 회사가 거짓말을 해도 들킬 리가 없었다. 또 나만 진심이었지, 나만.
이때 구경한 다이어트 사료 유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기들만 일단 믿으라며 체험단 광고만 뿌리는 사료, 다른 하나는 소화가 되지 않는 식이섬유로 부피를 늘려 포만감을 주며 지방 함량을 낮추어 섭취 칼로리를 줄였다는 사료.
첫 번째로, 식이섬유로 포만감을 늘리는 방법은 한시적인 방법이다. 소화가 어려운 불용성 식이섬유는 단순히 부피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수분을 흡수하고 커진 부피로 장을 자극해 소화불량을 만들기도 한다.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각종 미네랄이나 단백질의 흡수를 방해하기도 한다. 장이 예민하고 약한 고양이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항상 충분한 수분과 함께 섭취해야 자극이 덜한데 고양이는 탈수에 둔감하고 자발적으로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 동물이다. 건사료를 급여하는 한 음식을 통한 수분 섭취도 극히 적은 양이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고양이는 초당 약 0.4ml의 물을 마신다. 1분을 꽉 채워 마셔도 고작 24ml를 마셨을 뿐이다. 돌풍처럼 성장한 고양이 정수기 시장을 보면 온라인 피켓이라도 들고 싶은 마음이다.
또 사료에 들어가는 식이섬유는 보통 저급 사료에서 부피를 채우기 위해 넣는 싸구려 원료가 대부분이었다. 사탕무 펄프, 옥수수 글루텐박(*박=부산물), 대두분(*기름을 짜고 난 콩 찌꺼기), 정제 셀룰로스, 쌀겨, 밀기울 등 건강한 고양이를 위해 건사료를 고른다면 피하는 게 좋은 성분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불필요한 재료를 굳이 돈을 더 주고 찾아 먹는다고? 굳이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지방 비율을 낮췄다'는 대부분 그만큼 '탄수화물 비율을 올렸다'와 같은 뜻이다. 전체 칼로리도 중요하지만 그 섭취 칼로리 안에서 탄수화물 칼로리를 최대한 낮추는 것이 고양이 다이어트의 기본이다. 고양이는 포도당을 스스로 합성하여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섭취한 탄수화물을 소화할 능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건사료를 섭취하여 급격히 올라간 혈당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만성적인 고혈당은 고양이 비만을 유발하기 쉽다.
그런데 탄수화물을 굳이 또 늘리는 게 '다이어트'라니? 사료 회사의 함박웃음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다이어트 사료 시장을 처음으로 고안해 낸 사료 회사 직원은 엄청난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사료에서 단백질이나 지방 비율을 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생육 성분은 수분이 많아 유의미할 정도로 건사료에 들어가려면 재료비가 상당히 들어간다. 건조육 성분 역시 탄수화물 원료에 비해 가격이 훨씬 비싸다. 일부 사료는 고기를 더 넣는 것보다 완두콩 단백질 같은 식물성 원료를 넣어 꼼수를 쓰기도 하는 판국이다.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어쨌든 내게 우리 고양이 살을 빼야겠다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가슴팍 위에 올라온 파이 때문에 숨을 못 쉬어서 기절한 채로 발견될 수도 있단 말이다. 어느 것이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을지 사료를 분석하며 사료 전문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다이어트 사료'라고 쓰인 적당한 대기업 제품 마케팅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료 중에서 다이어트 효과를 주는 제품을 분석해서 골라낼 필요성이 있었다.
칼로리가 최대한 낮은 사료면서 탄수화물 원료는 혈당지수가 낮은 원료여야 하고, 탄수화물이 최소한으로 들어간 사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익스트루전 공법이 아니라 굽는 방법을 사용해서 칼로리를 대폭 낮추었다는 사료 등을 발견했다. 다이어트 사료라고 팔리는 사료보다 칼로리가 더 낮으면서 동시에 전성분이 크게 모나지 않고 무난했다.
이제 고양이 다이어트에 성공하겠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 찾아다니는 동안 파이와 스프는 열심히 포동포동해지고 있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사료 중 가장 낮은 칼로리의 사료를 고르고 골라냈는데 고양이 살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칼로리가 낮은 사료여도 고양이가 좋아하고 충분한 양을 먹으면 전체 섭취 칼로리가 많아 살이 빠질 리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실제로 섭취해야 하는 칼로리를 계산하고 급여 가이드에 맞춰 사료를 급여하려고 하니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양이 나왔다.
지금부터 고양이한테 칼로리 밸런스는 원래 한 끼에 한 칸만 먹고 하루에 한 개만 먹어야만 다이어트 효과를 볼 수 있는 제품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만큼만 먹으면 무슨 사료를 먹여도 당연히 살이 빠지겠다!
오죽했으면 최고의 고양이 다이어트 사료는 엄청 맛없어서 고양이가 먹기 싫다고 적게 먹는 사료라는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고양이가 싫어하는 사료를 사서 고양이가 살기 위해 최소한만 억지로 먹어준다면 살이 빠질 것이다. 근데 그렇게 고양이를 불행하게 살게 하기 위해 입양한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이다. 절묘한 기호성을 찾다가 고양이가 이렇게 맛없는 걸 먹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버티면 도리어 지방간이 와서 위험할 수도 있었다.
밥심으로 산다는 한국인의 습성을 역행하며 고양이에게 사료 그램을 재어 아주 조금씩만 주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고양이도 그전까지 심심하면 습관적으로 사료를 씹다가 한참 부족한 양을 정식 끼니로 먹어야 하니 배가 고프다며 보채는 일이 늘어갔다.
괴로운 고양이와 괴로운 인간은 그래도 이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면 살이 빠질 테니까 조금만 참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이 아주 미미하게 줄어들긴 했지만 별로 의미 있는 속도로 빠지지는 않았다. 참을성이 조금씩 바닥나 몇 개월에 한 번씩 의미 없다는 판단이 들면 더 낮은 칼로리와 낮은 기호성을 찾아 사료를 바꾸기 시작했다.
끝없이 사료 유목을 하다가 나는 고양이가 절묘하게 '좋싫어하는' 사료를 발견했다. 아주 싫어서 버티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먹지만, 다른 사료만큼 많이 먹는 것은 아닌 적당한 수준으로만 싫어하는 그런 최적의 사료. 사료를 퍼 먹이면서 이제는 진짜로 살을 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몇백 그람 정도 감량하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다. 다른 사료에 비해 유독 커다란 알갱이를 맛있게 아작아작 씹는 모습을 바라보며 날씬해진 우리 집 고양이를 꿈꿨다. 그러다가 정말 예상도 못 한 일이 생겼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 파이와 스프 건강검진에서 우리는 만성 신부전(CKD)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