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일기 6 종이 위에만 존재하는 질병
건강한 고양이는 최소한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 항체검사를 해서 추가접종이 필요하면 접종도 하고, 육안이나 각종 검사로 관찰되는 별다른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며 수의사와 질문도 주고받을 겸 다녀오는 것이다. 만성적인 질환이 있어 주기적으로 추적 관리해야 하는 고양이는 더 자주 검진하면 더욱 좋고.
2018년 6월의 그날도 병원에 방문해서 가벼운 건강검진을 할 계획이었다. 항체검사, 종합혈액검사, 복부 초음파, 엑스레이 정도. 아직은 건강하고 다 괜찮지만 체중은 관리해달라는 말을 듣겠지 기대하며 일 년 치의 안심을 돈으로 사려고 했다.
혈액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잠시 뒤 남수의사가 나와서 말했다. 크레아티닌 수치가 조금 높게 나왔는데 영 찝찝하고 혹시 모르니까 SDMA 검사도 해 보자고. 크레아티닌은 쉽게 이야기하면 근육 노폐물을 말한다. 신장이 이를 걸러서 배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혈액 속 크레아티닌 농도는 신장 기능이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지표 역할을 한다. 당연히 근육 양이 많을수록 수치가 어느 정도 높게 나온다.
파이와 스프는 체중이 많이 나가서 다른 개체보다 높게 나올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고 찜찜하니까 검사를 추가로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또다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병원 대기실에서 나는 처음 들어본 SDMA 검사가 무엇인지 열심히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SDMA 검사는 만성신부전 질환을 크레아티닌이나 비유엔(BUN) 항목 등에 비해 좀 더 조기에 신장질환을 발견할 수 있는 검사이다. 크레아티닌 수치는 신장 기능이 이미 70% 이상 망가졌을 만성신부전 2-3기부터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한다. 반면 SDMA는 신장 기능이 20~40% 정도 손상되었을 때부터 일찍 수치 변화를 보여주어 신부전을 초기에 발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던 SDMA 수치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수치가 대략 14-15를 넘어가면 만성신부전을 의심해볼 수 있고 25 이상이 나오면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된 2-3기 정도로 본다고 하던데, 파이는 17 정도였고 스프는 27이라는 높은 숫자가 나왔다.
더 설명을 하자면 만성신부전은 단순하게 혈액검사만으로 진단을 내리지 않는다. 혈액검사(주로 크레아티닌, 비유엔 항목), SDMA 검사, 요 비중, UPC(소변 속 크레아티닌 비중), 단백뇨 스틱, 신장 초음파(중요), 필요하면 전해질 검사, 경험이 많은 수의사는 직접 신장을 만져보는 촉진까지 시행한 다음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인터넷에서는 크레아티닌과 SDMA 수치만으로 만성신부전의 기수를 4단계로 구분해놓곤 하는데 이 구분도 실은 수의사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단순히 크레아티닌과 SDMA 수치만을 확인하고 진단을 내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환묘 카페에 있다 보면 가끔씩 더 자세한 설명 없이 혈액검사 결과를 기계적으로 읽어주며 갑작스럽게 만성신부전이라고 진단 내려 보호자를 겁먹게 하는 사례가 올라오곤 한다.
게다가 엄밀하게 따지자면 만성신부전은 최소한 2-3개월 이상 이어진 신장기능부전을 의미하니 처음 본 고양이의 검사 결과를 보고 만성신부전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파이와 스프는 혈액검사뿐만 아니라 초음파 상에서도 하얗게 굳어 섬유화가 진행된 부분이 보였기 때문에 잘못되었거나 섣부른 진단은 아닌지 낙관을 가질 수 없었다.
당시 해당 검사를 모두 마치고 종합하여 파이는 신부전 2기로 넘어가기 직전인 1기 후반, 스프는 2기 초반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각종 혈액검사와 소변검사 등에서 명확한 수치 변화가 나타나는 말기 상태는 아니지만 SDMA 수치 변화와 초음파 상으로 섬유화 된 부분이 대략적으로 관찰되는 중간 단계였다. 3기에서 4기(말기)로 넘어가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라지니 이 단계를 최대한 오래도록 유지해야만 한다는 설명을 듣자 조금 정신이 멍해졌다.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고양이의 1/3이 나이가 들어 만성신부전을 앓게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노령묘의 절반 정도는 신장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갑자기 우리 고양이에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당시 파이와 스프는 고작 3살 추정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수의사는 본격적인 건강검진은 고양이가 아프기 시작하는 5-6살 이후부터 해도 충분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그런 말을 믿고 계속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다면? SDMA검사까지 마치지 않고 조금 찜찜한 상태로 병원을 나왔다면? 관리받지 못 한 파이와 스프의 신장은 더욱 빠른 속도로 망가졌을 것이고 그 이후의 일은 자세하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고양이 건강검진 때 SDMA 검사도 꼭 넣어서 해보라고 외치는 SDMA 전도사가 되었다. 금액은 병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약 4-7만원 정도 하고, 기계 관리 상태에 따라 수치 변동이 있기 때문에 병원 내 장비가 있더라도 연구소에 보내서 측정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몇만 원 선에서 살 수 있는 안심이라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 아닌가. 신장 질환은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해서 속도를 늦추는 것만이 최선이다.
남수의사는 조심스럽게 둘이 서로 다른 개체인데 갑자기 비슷한 소견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생활 패턴, 그중에서도 사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며 지금 급여하는 사료가 무엇인지 묻고 기록하더니 이 사료는 앞으로 먹이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원래 유명하지 않은 사료는 재고가 남아 수입 과정에서 방치되면서 산패되거나 변질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
만성신부전은 선천적 기형, 바이러스, 결석 등 다양한 원인이 있으며 아직 정확하게 무엇이 원인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그래서 권유하기만 한 것이다. 어차피 세상에 사료는 너무나 많아서 이거 하나쯤 영원히 먹이지 않는다 해도 몇 트럭을 채우고 남을 사료가 있으니까.
*산패된 건사료가 만성신부전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것은 당시 수의사의 추측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만성신부전의 원인은 아직 의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파이와 스프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얼떨떨했다. 우리 집 고양이는 멀쩡한데. 멀쩡한 줄 알았는데. 조금 살이 쪘을지언정 그저 건강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신장 기능이 이미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니. 자꾸만 초음파 상에서 하얗게 굳어져 기능을 잃어버리고 울퉁불퉁해진 신장 사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단지 고양이 살을 빼주는 맛없는 사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신장을 망가뜨린 범인일 수도 있다니. 우리 집 고양이가 아픈 증거는 그저 종이 위에 숫자로만 존재한다는 것에 적응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양이 비만은 모든 면에서 고양이 건강에 나쁘다고 역설하는 문장들이 나를 아프게 때렸다. 이제 와서 정신 차리면 뭐하나. 이미 굳어버린 신장을 되살릴 방법은 없었는데.
신부전 환묘가 모인 카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고양이가 투병을 종료하고 떠났다는 글이 올라오고, 그동안 건강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증상을 보여 검진을 해 보니 만성신부전이 상당히 진행되어있었다며 절망하는 글이 중간중간 새롭게 섞였다.
신장은 충분히 망가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신장의 70-80%가 이미 망가진 상태여야 시작되는 말기 만성신부전 증상은 구토, 입 냄새, 식욕부진, 활력 감소, 다음(물을 많이 마심), 다뇨(연한 오줌을 많이 쌈) 등이다. 고양이 특성상 절대로 보호자가 일찍 증상을 관찰하여 발견할 수 없는 질병이다. 오직 검사와 숫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병이었다. 그나마 파이와 스프는 일찍 발견해서 일찍 진행속도를 늦출 시도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반응이 내게 쏟아졌다.
우리 고양이 신장 절반 이상이 망가졌다는데 그게 무슨 다행이야, 하는 반발심이 손목까지 차올랐지만 말기 투병으로 피폐해진 다른 이들 앞에선 그저 고맙다고 반응하는 게 전부였다. 이미 중형차 한 대 값을 투병 비용으로 지출했다는 글, 신부전은 돈을 들인 만큼 살다 간다는 글, 너무 많은 투약 시간표를 지키기 위해 직장을 관두고 투병에 전념하고 있다는 글을 보며 침을 삼켰다.
한번 나빠진 신장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모두가 지독하게도 알고 있었다. 최대한 진행 속도를 늦춰보는 것이 치료의 전부인데 그 진행 속도에 매달려 모두가 효과가 증명되지 않은 보조제를 마구 사들이고 병원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아직도 고양이가 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우선은 나도 그들의 반응대로 어서 치료를 시작해야만 할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신부전 초기 치료는 대부분 적당한 수준의 식이관리와 음수량 확보뿐이다. 우리 고양이도 역시 식이관리를 하고 물을 마셔야 했다. 살이 쪘으니 더 많이 마셔야 했다.
비만 고양이의 투병은 모든 것이 정상체중 고양이의 곱절이었다. 다른 고양이는 하루 1-2알(~4.6kg) 씩 처방되는 비싼 신장 전용 유산균도 수의사가 하루에 4알은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는 정말로 핑계를 대며 미룰 수 없었다. 신장 관리도 하고, 신장 관리를 위한 다이어트까지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