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 4권>을 읽고서
오늘은 요 근래 처음으로 또박또박한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이번주는 느낌이 좋아요, 기복이 조금 있긴 하지만 시간이 빠르게 가고 있고 해야할 일을 무리 없이 끝마치고 있습니다. 카트라이더를 하라고 말해준 주은과 지뢰찾기를 소개해준 소현에게 가장 감사합니다. 나 카트라이더를 깐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는데 골드 티어 찍었다? 좀 우습긴 한데 갑자기 운전에 자신감이 붙어서 여름에 운전 연수를 받을 생각입니다.
수면제는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이유는 많은데요. 첫째 자꾸 새벽에 일어나서 누구한테 전화를 거는데 그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존나 수치스러워서 처음 통화 기록 확인했을 때 자살하고 싶었습니다), 둘째 술을 마시는 날이 마시지 않는 날보다 많기 때문에, 셋째 점점 자주 한번에 여러 알을 복용하게 되어서. 기타 등등의 이유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습니다. (의사 선생님한테 굳이 말하지는 말걸 약을 계속 타놓을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수면제를 먹지 않으니 확실히 책이 잘 읽어지는 것 같긴 하구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오늘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은 요 며칠 미셸 푸코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의 역사 4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성의 역사 4권>은 기독교 윤리가 도입되면서 우리에게 어떤 전제를 심어졌는지를 확인시켜줍니다. 기독교 이전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성 윤리를 포함한 모든 윤리가 ‘자기 배려’를 위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아래에서는 ‘자기’를 잘 살게 하는 일은 너무 협소한 일이 됩니다. 대신 인간은 대의를 위해, 말하자면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가닿을 수 없는 존재인 하느님, 하느님이란 무릇 인간과는 요만큼도 겹치는 지점이 없는 완전한 신입니다.
하느님에 비해 결점이 많은 인간이 해야할 일은 따라서 매우 제한적입니다. 하느님 닮기 위해 노력하기, 하느님께 벌 받지 않기 위해 애쓰기. 이런 태도는 기독교 교인들에게서 원형적으로 보였던 모델이지만 기독교적 윤리 하에 세워진 근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지독한 무신론자조차 누구나 비슷하게 ‘기독교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닿을 수 없는 존재인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 (혹은 ‘적당한’도 ‘완전한’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쓸모 없어진다’는 벌 받지 않기 위해 애쓰기. 이 불안불안한 극단을 일상생활에 도입한 이상 자본주의가 사람을 장악하는 일은 너무 손쉽습니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은 지침이니까요. 너는 창의적 인재가 되어라, 너는 성실해져라, 너는 사회성이 좋아져라... (아니라면 너는 고생한다, 아무튼 불행해질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토양 아래 훌륭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무진 노력합니다. 갑갑하고 허무할 것이란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지배적인 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존재에 항시 냉소적입니다. 아 너무 우스우니까요 나를 행복할 수 없게 하는 선택지에 헌신하는 내가 어이가 없으니까요.
또 한 가지, 기독교는 우리를 처음부터 ‘죄인’으로 점찍어놓습니다. 우리는 따라서 항상 죄를 고백하며 살아가야합니다. 우리는 늘 되새기고 고백하기에 과거의 내가 저질렀던 잘못,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약해져 있었던 기억을 오래 잊지 않습니다. 현실을 잘 살아가다가도 우리는 종종 우리를 ‘그 시절 최악의 나’로 환원시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조마조마해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모습이 항시 있는 것입니다.
푸코는 말합니다. “(속죄의 고행은) 자기의 객관화와 관련되지 않고, 자기 표명과 관련된다. 자기 표명이란 우리가 참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의 의식이자 확인이고, 동시에 우리가 살아온 과거에 따라 재생된 삶을 의식하고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소가 여물을 씹듯 과거를 반추하는 일을 하는 순간 우리는 그곳에 참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게 됩니다. 나의 경우, 나는 자주 열네살 적 괴팍하고 우울한 중학생으로 (아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시절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삶이 그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 재생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아마 아니지 않을까요? 매 순간 이미 나는 달라지고 있는데, 그걸 고집스럽게 부인하는 건 나 스스로뿐인 것이 아닐까요? 요지는 내가 내게서 과거의 그늘을 자꾸 발견할 때, 현재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직시할 능력은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해야할 일도 바로 현재성의 복원일 것입니다. 과거의 나에 대한 불신, 미래의 내가 완전해지길 바라는 허망한 다짐을 벗어나 우리는 현재를 바라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은 당장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이냐는 문제 뿐입니다. 이 순간 상황에 맞게 가장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나는 이랬던 사람이니까, 혹은 나는 이런 사람이 되기로 다짐했으니까, 하는 사변을 제외하고서 말입니다.) 철학을 하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거창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적어도 제가 공부를 통해 얻어가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에도 수천번씩 내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또렷하게 직시하기. 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 바로 현재의 선택들이 모여 구성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그리하여 나는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는 선택의 주체로서 자신감 있고 생기 있게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