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진 후 일년간 3대륙에서 난리친 연대기
2019년 회사 건강검진에서 당뇨전단계라는 이야길 들었다. 70%가 당뇨로 진행한다는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아 커피 대신 매일 입에 달고 살던 단 음료를 끊고 (도대체가 디저트와 액상과당, 탄수화물이 판을 치던 나라에서 이에 대한 기초 교육이 전혀 되지 않았던 건 아직도 좀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식이제한을 해 몸무게가 5-6kg정도 줄자 타는듯한 목마름, 밥먹고 나서 미친듯이 졸리던 현상, 얼굴에 나던 뾰루지가 사라졌었다. 이렇게 나아지는 거겠거니 하고 캐나다로 향했다. 건강검진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다가 22년 초에 동생 찬스로 건강검진을 했더니 당뇨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의 공복혈당이 나왔다. 기준과 1mg 차이. 게다가 안과검진에서는 황반변성이 있는 것 같으니 추가 검사를 해보라는 말이 적혀있어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나중에 받은 검진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아마도 결과지가 섞였거나 하는 이상한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검진결과에 충격을 받고 미국에 오자마자 운동을 시작했다. 흰 쌀도 끊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나 당당하게 검사하러 간 학교 검진센터에서 오히려 더 오른 공복혈당을 받아들었다.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기다리던 그 대기실이 아빠가 아플때 찾았었던 서울삼성병원의 그것과 너무 비슷해서 안그래도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던 참이었다. 혈기왕성하고 딱히 아픈데 없는 20대 애들을 주로 보는 대학교 소속 의사는 내 결과를 보고 좀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BMI도 낮고, 그런데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너는 내분비내과를 좀 가봐야겠다. 예약은 두달 뒤에 잡힐테지만. 한국에서는 전단계에서는 처방해주지 않는 메트포르민 약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당뇨라니. 온갖 처참한 합병증의 이름들이 머리를 떠돌았다. '당뇨'라는 말에서 스멀스멀 스티그마들이 스며나와서 내가 갖고 있던 세계를 늪처럼 좀먹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나라는 사람과 당뇨라는 질병은 함께 있으면 안되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당뇨 판정을 받고 나서 적어도 5-6개월간은 그 양립 불가능한 단어가 나라는 존재를 150% 설명했다. 나는 당뇨 환자였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 병과 관련있었고 내가 행동하는 모든 것이 그 병에 대한 인지로부터 촉발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며 질병과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크게 남았던 탓인지 그 즈음 내 몸과 마음은 죽음을 앞에 둔, 포식자 앞에서 벌벌 떨며 삶을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하는 먹이 그 자체로만 기능했다. 첫 5일간은 음식에 대한 혐오가 생겨났다. 하루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처음으로 혈당계를 사고나서, 샐러드 조금과 오트밀 한 수저를 먹고 혈당을 쟀다가 그동안 건강식품이라 믿었던 오트밀 한수저에 혈당이 미친듯이 올라가는 걸 보니 그 음식을 음식이라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한 끼를 샐러드 한 줌만 먹는 식으로 살았다. 먹는게 너무나 두려웠고 인체가 완전한 각성 및 fight or flight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보니, 그때는 그렇게 해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와서 더 먹기가 힘들었다.
하필 시카고 학회와 페루 여행을 앞둔 시점이어서 짐을 빼느라 방은 폭탄맞은 것 같았고 그 와중에 학회에 가져갈 포스터를 수정하느라 짐을 싸다가 일을 하다가를 반복했다. 먹은게 없으니 자리에서만 일어나도 눈앞이 핑핑돌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에 그 컨디션으로 모든걸 해내면서도 쓰러지지 않은건 그 전 4개월동안의 운동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다. 몸이 그렇게 보여주고 있었는데도 나는 완전한 무력감에 휩싸였엇다. 이렇게 했는데도 되지 않는다는건, 그 의사가 말한 것처럼 내 몸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싶어서. 그 즈음에 집에서 파이프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집에만 들어가면 삐 하고 거슬리는 파이프 웅웅대는 소리가 들려서 화이트 노이즈를 켜놓고 생활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잠도 잘 수 없었다. 상체에 빨갛게 발진도 올라왔다. 벅벅 긁으며 그 상태로 시카고를 갔다. 조용한 시카고 호텔에 누워서 한 숨 자야지.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내게 이명이 생긴걸 알았다. 너무 소리가 커서 내 귀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서야 탄수화물을 먹기 시작하니 간지러운 것들이 점차 사라졌고 이명도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나는 하루에 이만 오천보를 걸었고, 학회 발표도 잘 끝마쳤으며, 이후 뉴욕을 거쳐 페루행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결정이었다. 몸이 개작살났는데 그렇게 사는 바보가 어디 있는가? 지금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뇌로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 그 때 나는 만약에 내가 정말 큰 병에 걸린거라면 이게 페루에 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가는게 맞다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맞닦뜨려야 하는 엄마와의 싸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빠가 아플 때에 엄마가 했던 말과 행동이 옆에서 보는 나에게도 너무나 큰 아픔이 되었었고,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엄마가 남에게 굉장히 공격적이 된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에 생겼던 일들을 만약 지금 그 상태에서 마주한다면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이건 그 때 당장은 아니었지만 그 6개월 이후 다시 마주하게 되는 일이긴 했다마는.
그렇게 가게된 리마에서 결국 나는 쿠스코행을 포기하고 갑자기 편도티켓을 끊어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은 채로. 페루에서 나는 매일 미친사람처럼 혈당을 재고 밥을 먹으면 운동을 하고 저녁엔 또 운동을 하고 남는 시간에 과제를 끄적이며 살았다. 그러다 한달만에 지표가 개선된걸 알자마자 '좀 더 빡세게 달려보자' 라는 생각에 그동안 먹지 않았던 약을 먹었는데, 2일 차에 겪어본 적 없는 미식거림과 두통을 겪고 새벽에 응급실을 가는 일까지 생겼다. 안 그래도 죽음을 앞뒀다는 생각으로 살던 사람에게 약의 부작용이 왔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지금도 나를 공포 한 가운데에 가두는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친구를 깨워 새벽에 응급실로 향하면서 나는 핸드폰에 유서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친구는 그런 내가 너무나 버거웠을 것이다. 굳이 이 멀리까지 와서, 혈당 관리를 한다고 난리난리를 치다가, 약 한알에 갑자기 죽을것 같다고 새벽에 응급실을 가는 난리를 벌였으니 말이다. 그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동시에 내게 그 사건은 트라우마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런 내 상태에 대한 이해를 바랄 수 없는 상황도 답답하고 외로웠다. 그래서 친구의 집을 나와 바닷가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내가 떠나자마자 친구가 코로나에 걸렸다.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이틀치 짐만 가지고 일주일 넘게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살게 되었다. 좋아하는 지역의 거리를 아침에 걸으며 커피도 마시고 요거트도 사먹고, 끝내주는 샐러드를 배달시켜먹으며 지냈다.
그러나 페루의 인프라는 열악해서 루프탑에 수영장이 있는 숙소를 가도 샤워를 5분만 하면 샤워기에서 찬물이 나왔고, 건물의 방음은 어딜가도 잘 된 곳이 별로 없어서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 때쯤 병원에서 누락되었던 콜레스테롤 검사 결과를 받았다. 듣도보도 못한 수준의 높은 수치가 나왔다. 그걸 받고 바로 이틀 후에 출발하는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던 것 같다. 페루에서 한국행은 미국을 거쳐가야 해서 그런지 바로 다음날 다다음날 출발하는 비행기가 무척이나 싸게 나왔었다. 다음날 코로나 검사를 하고, 친구네 집에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 30분만에 짐을 싸서 나와서, 다다음날 귀국하게 되었다. 등록하는 걸 페루 친구가 대신해줬는데 저녁에 너무 피곤해서 만나지 못하는 바람에 이 돈은 결국 한국에 와서 보내주게 되었다. 잘 모르는 한국인을 도와준 리마 사람들의 친절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지병에 얽힌 스토리가 드라마틱 할 테지만 나는 좀 애써 더 드라마틱했던 것 같다. 오기 전에 난리 난리를 쳐놨던 덕에 오히려 한국에 오고나서는 전폭적인 정서적 지원을 받으며 심신의 안정을 취할 수 있었고, 채식을 하며 콜레스테롤 수치도 이전만큼은 낮춰놓고 다시 미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내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냐면, 석사를 포기할까 진지하게 고민이 될 정도였다. 이미 너무 몸이 힘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더한 스트레스를 나 자신에게 주는게 아닐까 싶어 많은 고민을 했었다. 아마도 캐나다 영주권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아니었으면 아예 나가지 않았을 것도 같다.
우선은 끝내놓고 고민하자는 생각으로 출국을 했고, 늦은 출국으로 인해 집이 없어서 한달 반가량은 학교에서 자전거로 3-40분이 걸리는 외곽의 모텔에서 학교를 다녔다. 가장 친한 친구가 출산 후 아이를 잃는 너무나 힘든 경험을 한 것이 그 때였고 삶이 참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도 있구나 받아들이게 된 것도 그 때즈음 이었던 것 같다. 의외로 그 학기의 석사 생활은 꽤나 순탄했는데, 이 한달 반 동안 아마도 나는 '돌아오길 잘 했다' 라는 일기를 썼던 것도 같다. 물론 이것도 친구네 집으로 이사가기로 결정하면서 완전히 박살났지만.
혼자 사는게 나쁘지 않았고 자전거를 매일 열심히 타게 되었던 모텔의 위치도 좋았으나 레노베이션으로 인해 내 방에 바퀴가 출몰하였고 누구나 복도에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던 탓에 안전하지도 않았었다. 그 와중에 친구의 룸메이트가 석사를 포기하며 집에 돌아가게 되었고 나는 역시 운이 좋구만 하고 후다닥 이사를 했었다. 너무나 착하고 젠틀한 그 친구의 집은 상상이상으로 더러웠고 나는 여기서 엄청난 수준의 아토피까지 얻게 되었다. ㅜㅜ 얼굴 그것도 눈 근처가 퉁퉁 붓고 고름이 나고 딱지가 얹었다가 저녁에 피가나는 일이 반복되었고 하필 그 즈음에 박사지원을 마무리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집의 위생상태보다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나 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대충'하려던 박사 지원은 결국 영혼을 갈아넣은 2주간의 스퍼트로 바뀌었고 모르긴 몰라도 그때의 2주가 내 평균수명을 적어도 1-2년은 깎아먹었을 것이다. 집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장보러 갈 시간도 없어서 비를 뚫고 간 편의점에서 땅콩과 육포를 사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쇠약해진 정신상태로 내려버린 결정 때문에 당시 데이트 하던 잘 모르는 사람을 한국에 데려오는 기행을 저질렀다. (도대체 이 개빡센 결정들의 끝은 언제 날 것인가..?) 10일간의 방문을 끝내고 그가 돌아가고 나니 가족 드라마가 터졌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신기한 건 내가 이 때에 ‘드디어' rock bottom을 쳤다는 것이다. 자살충동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크게 일어났고 그게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고 울다가 잠들고, 다음날은 하루종일 누워서 울었고, 그날 저녁에 어떻게든 힘을 내서 집을 나갔다. 지하철 탈 힘이 없어서 집에서 한정거장 떨어진 거리의 에어비앤비에서 며칠 있었다. 그리고 또라이 같지만 그 에어비앤비에 머무는 동안 이전에 컨택했던 교수님의 랩 미팅에 참석을 했다. 줌으로 이뤄진 미팅이고 화장을 하면 되니 아무도 내가 그 전까지 이삼일을 내내 울기만 한 사람이란걸 몰랐으리라. 미팅이 잘 끝나고 나서 숙소 밖으로 나가 공원을 좀 걸었다. 그때 생각했다. 아, 살 수 있겠구나. 내가 돌아왔구나.
내가 아침에 당근마켓에서 사 온, 싸게 사서 뿌듯했던 가방을 보며 저 끈이 내 무게를 견딜만큼 튼튼할까 라는 생각을 했을 때 나는 그 생각이 너무 무서워서 소리치면서 울었다.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겪어보는 짐승같은 감정이어서 그 말을 전하기가 두려웠다. 그 말을 들은 내 사랑하는 친구는 나에게 '너의 그 살려고 하는 에너지를 사랑해' 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너무나 운이 좋게도, 가장 내가 마주하기 싫은 나의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을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옆에 두었다. 그리고 그 말은 내게 하나의 씨가 되어서 자랐다.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나는 이 모든 숨막히는 불안과 공포와, 쉴틈없이 불어닥치는 일련의 재앙 속에서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버티고 싸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 재앙들이 나다움을 앗아가 버린 줄 알았는데, 그 재앙 앞에서 버티는 모습이 그게 나였던 거구나.
이 폭풍우와도 같던 사건들이 지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와 당뇨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몰랐다. '관리'를 하려고 하면 그 모든 정보와 안좋은 예후와 예시들에 빠져드는 나 자신과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피하려면 관리에 소홀하게 되어 죄책감까지 덤으로 얻는 선택의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하게 사느라 기존에 잘 해내던 것들도 벅차게 느껴지곤 했다. 해외에서 살면 언제나 영어를 써야 하고 이방인인 자신을 인식하느라 내가 가진 리소스의 30%정도는 항상 운용하고 있는 기분인데, 이 질병이라는 것은 내 평소 가용자원의 70%정도는 잡아먹는 것 같았다. 자연히 내 맘에 들지 않는 행동과 결과가 늘어갔다. 이메일에 제때 답장을 못한다거나, 정말 중요한 발표나 미팅을 잊거나. 물론 어마어마한 스트레스 때문에 뇌세포가 많이 죽었을 것이고, 그동안 늘어난 인슐린 저항성이 해마에 좋은 영향이었을 리 없다. 신체적으로 좀 넘기 힘든 허들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이 허들은 내 건강 뿐만 아니라 내 생활 전반과 인지능력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무섭다. 무섭고 두렵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이 삶에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어렵다.
그런데 이런 무섭고 두렵고 어려운 감정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앗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집에서 나온지 일주일이 좀 지나 출국을 며칠 앞둔 날 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났다. 내 생일이었다. 아침에 친구들을 만나 밥을 먹고 저녁에 가족들을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만났다. 집에서 먼 곳에서. 설날이 코앞이라 희한하게도 우리가 가는 곳마다 외국인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가족들이 그 환경에 같이 있는 경험 자체가 내 세계를 이해받는 느낌을 주었다. 한국인이 많았다면 하기 어려웠을 얘기들이 술술 나왔다. 엄마는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고 했고, 동생은 오늘 어떻게 얘길 꺼낼까 너무나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또 이야기를 이끌어주니 고맙다고 울었다. 내가 나가있는 동안 내가 너무 걱정이 되어서 동생은 내 지인들의 인스타그램을 다 들어가보고 있었다. 동생 둘이 그 날 내게 준 편지는 태어나 내가 받았던 물리적인 선물들 중에 가장 값진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이해를 받고 있다는 기쁨.
그리고 3일 후 나는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아토피가 다시 생기는걸 보고 그제서야 그게 그 집의 문제임을 알았다. 룸메와는 절연하고 바로 워싱턴으로 이사를 갔다. 홀푸드에서 건강한 간식도 먹고, 가고싶던 갤러리도 가고, 녹차라떼를 파는 예쁜 타테에서 과제도 했다. 그 와중에 뉴욕을 두번 오가며 박사 진학을 결정했다. 이렇게 마지막 학기를 거의 원격으로 '대충' 끝내고 나는 그렇게도 우여곡절이 많던 석사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우습게도 혹은 신기하게도, 내가 이 모든 과정을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큰 계기가 된 것은 그토록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석사 프로그램으로부터 받은, 아무 의미도 없을것만 같던 졸업장이었다. 너무나 내가 싫어하는 내 학교의 특성과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라틴어로만 쓰여있어서 이해할수도 없는 이 졸업장은 내게 '졸업'을 선물해줬다. 이 모든 사건이 이제는 종료되어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올 수 없게끔 막아주는, 과거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환불규정이 (어쨌든 환불불가) 자세히 쓰여진 티켓 같았다고나 할까. 그것은 내게 ‘너는 이런 사건들을 겪어냈고, 그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관계없이, 크게 봤을 때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너는 이것을 졸업했고, 그 경험의 총체적 합은 이 서류적 증거로 남아서, 너의 가치를 적어도 낮추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해주었다. 그것이 내게 남은 졸업의 의미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것이 너무나 후련하고 뿌듯해서 길거리를 걷다가도 괜스레 웃음이 나오고 어깨가 펴지곤 했었다. 난! 졸업을! 했다! 라고. 인생에서 많은 졸업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의미가 있는 졸업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가 트라우마에 휩싸인 먹이모드에서 내 미래에 대한 컨트롤을 갖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내 자원으로 갖고 다시금 미래를 계획하는 휴먼모드로 들어가겠다라는 결심이자 이정표였다. 이렇게 느끼게 되기까지 1년이 걸렸다. 그 1년동안은 병원가는게 너무 무서웠는데, 이제는 병원을 가고 내 몸을 더 챙기기 위해 비행기표를 좀 미루는 결정을 할 수 있는 휴먼이 되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이 당장 나의 삶을 여기서 끝나게 하지 않을 것임을 이제 이해한다. 종말론과 행복, 현실적인 개선안들은 절대 같이 갈 수 없다는 것도.
내가 30대라는것 자체는 그 자체로 딱히 의미가 없지만 30대까지 살아오기 위해 엄청나게 고생한 흔적들이 내 자아에 포함된다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듯이, 내가 당뇨인게 난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것이 내가 '졸업'한 것들의 흔적임을 이제 안다. 물-론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질병이야말로 사실 아주 많은 종류의 편견과 고정관념과 victim blaming이 목적으로 삼는 아주 좋은 대상이기 때문이겠지. 그럼 그건 앞으로 내 연구의 주제로 삼아 내 밥벌이도 하고, 나와 같이 신체적 부침에 덧붙여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어지는 경험까지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도 되면 될 일이다.
아버지를 보낸 후에 다시 오지 않을것만 같던 순간들을 다시 보게 된 순간들이 있었다. 드디어 예전처럼 바람이 느껴지고 꽃들이 아름답던 순간들. 내가 나로 존재하며 앞날을 꿈꾸고 계획할 수 있는 것도 자연스럽게 주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걸 이제는 더더욱 알기에, 앞날을 '아직도' 기대하는 내가 신기하고 대견하다. 이런 삶의 경험들이 있었는데 아직도 뉴욕 부동산으로 돈 번 사람들의 유튜브에 홀려 몇시간을 '어라'하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원래 중요한거 맞나 고민하고 있지만서도.. ㅎㅎ 워낙에 뚝배기 쎄게 박는 경험을 했기에 유리컵 땡땡 두드리는 소리로는 삶이 변하지도 변해서도 안된다는것을 이제는 잘 안단 말이지.
졸업 전의 나는 아마도 내가 이런말을 하면 위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졸업을 한 나 자신으로서 감히 말해보자면, 삶은 정말로 아름답다. 왜 아름답냐고 하면, 인간이 가진 고통들은 보편성에서 오는 반면에, 행복과 환희와 희망같은 인간을 나아가게 하는 것들은 개별성에서 와서 그렇다.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고결한 자세로 지나는 인생의 선배들을 보며 더더욱 느낀다. 바라지 않았던 고통의 경험들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버린 지금 나는 그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꿔나간 자아가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건 그 고통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제가 아니다. 인간과 삶이 겨우 그따위의 깊이였으면 인류는 더 많은 재앙을 목격한 아주 오랜 옛날에 절멸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게 그냥 유전자의 본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산물로서 생겨난, 꽤나 쓸데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가 몇천년 뒤에도 화성이든 어디든 거기서 감자캐고 살더라도 눈을 반짝이며 서로를 안을 수 있는 이유가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낭만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