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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Mar 21. 2021

절대 최선을 다하지 말 것

최선을 다한다는 것의 무서운 함정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부러웠다. 나도 내가 하고싶은 걸 한다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하고싶은 걸 하며 사는 삶을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다.


그런데 최선을 다해보니 (최선을 다했다 라는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살다보니) 알겠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ㅎㅎ 그래서 일년 반 정도 되는 시간동안 배워버린 것을 여기 좀 남겨볼까 한다.



1. '최선을 다한다는 것'의 정의는 많은 사람에게, 능력의 100%를 쓴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 아니다.

노오오력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다'라는 말을 은연중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의 중요도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시간을 그 일에 쏟고, 소비되는 정신 자원의 거의 대부분을 그 일에 쓰는 것. 이것이 우선 이 글에서 말하려는 '최선'의 operational definition이다. ㅎㅎ 그런데 이 최선이라는 것은, 어떤 일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능력 발휘'를 위한 조건과 사실은 완전히 별개의 말이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어떤 일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그 일의 속성과, 그 일이 필요로 하는 능력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시장에서 가장 신선한 바나나를 사오겠다. 라는 일에, 엄청난 근력과 끈기가 있을 필요가 없다. 그걸 위해서는 (신선한 바나나를 파는) 적재 적소에, (신선한 바나나가 팔기 시작하는 그 시점에) 적시에 있는게 가장 중요하기 떄문이다. 그 장소와 시간과 심지어는 날 먼저 들여보내줄 마트 주인이 있다고 하면, 24시간 바나나를 생각하고 신선한 바나나란 무엇인가를 찾고 머릿속에 그리며 바나나 1톤을 나를 수 있는 근력이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조건들이 되는 것이다. 있으면 좋은데, 그것들은 절대 목표달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머지 24시간동안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행복한 마음으로 와서 마트 주인하고 행-복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그 24시간동안 바나나에 목을 매다가 마트주인에게 바나나 어디있어요!!! 할 사람보다 훨씬 좋고 신선한 바나나를 집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목표 달성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둬버리면 써버린 에너지의 양과 가져가는 성과가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


2.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한계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당연히, 최선을 다했다는 주관적 평가와 진짜 내 한계는 다른 개념이다.

  심리학에는 Belief in a Just World라는 개념이 있다. 착하게 살면 복이 올거고, 나쁘게 살면 벌 받을거고, 열심히 하면 잘 될거고 막 살면 못 될거다 이런 믿음, 세상이 어쨌든 바르게 사는 나에게 불행을 주지 않을거라는 이상한 확신이다. (이후부터는 그냥 내 생각) 착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볼 때 우리가 충격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상이 안전하고 공평할거라는 믿음 없이는 사실 우리는 당장 내일을 계획하기도 힘들거든. 그래서 우리는 소년만화를 읽는 유년기 어린이같이 세상이 막연히 공정할것이라고 생각하고, 불행을 입은 이에게 어 대충 너네 탓이 있겠지 생각해버린다. 왜냐하면 그게 세상이 불확실하고 불공평한것이란걸 아는 상태에서, 내가 가진 모든것이 그저 모래성 위에 있을 뿐이라는걸 인정하고 내일을 계획하는 것 보다 쉽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이 노력과 어쩌구 웅앵웅을 잘 알아서 나에게 맞는 결과를 가져다 줄거야'라는 믿음이 '최선을 다하는 것'에 도사린 아주 큰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우릴 둘러싼 수천만가지 환경적 변수는 절대로 우리의 노력에 대한 주관적 인식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결과는 그저 여러가지 변수의 합으로 도출될 뿐이다. 어쩌다 신선한 바나나를 가진 사람이 내일 우리 집 앞에 신선한 바나나 하나를 떨어뜨린다고 하자. 혹은 내 신선한 바나나를 집에 오는데 왠 코끼리가 뭉갰다고 하자. 이 일에는 '신선한 바나나를 위해 노력해 온 내 지난 세월과 진심'이라는 변수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근데 전자는 '내 진심과 노력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 될 확률이 크고, 후자는 '내 진심과 노력을 하늘이 몰라준 큰 불행'이 될 확률이 크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어떤 변수가 얼마만큼 작용하는지 (예를들어 코끼리처럼 내 노력과 전혀 상관없는 변수가 끼어들었는지) 가 확실하게 보이는 노력/결과의 쌍이 잘 없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아는 것은 결과, 그리고 내가 그 결과에 만족하는지, 그리고 내가 다한 진심과 노력 이 정도의 변수들 뿐이다. 그러니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이 대충 두가지인데, 하나는 내 진심과 노력이라는 변수와 결과값이 크게 상관없을 수 있다는 것이고, 하나는 진심과 노력이라는 변수가 결과값 도출에 아주 크게 기여하였지만, 그저 내 진심과 노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전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영원히 불확실성의 미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보통 후자를 택한다. 그게 맞을 수도 있다. 코끼리가 밟을 수 있는 것까지 생각하고 탑차를 준비해갔었어야지? 하는 결과론적인 해석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여기에 '난 최선을 다했는데' 라는 생각이 스며들면, 1. 최선을 다했어, 2. 그래서 난 더 좋은 진심/노력 변수를 내놓을 수 없었어. 3. 그래서 '여기가 내 한계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여러가지 측면에서 틀린 생각인데, 첫번째로는 결과론적인 해석이 별 의미 없어서 그렇고 (끼워맞춰서 일리가 있는 논리들이 정말 진실과 가까웠다면 유튜브 사주팔자를 믿고 살면 된다. 사는 동안 결과를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에 크게 도움 안되는 접근일 때가 많음), 두번째로는 '최선을 다했다'라는 추상적인 말이 '더 좋은 변수를 낼 수 없었다' 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이상하게 뒤얽혀서 갑자기 '한계'라는 초대받지 못한 자식변수를 만들어내서 그렇다. ㅎㅎ 앞서 말했듯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좋은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도 훨씬 더 좋은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리다. 특히 이 '최선을 다한다'는 개념에 들어있는 '내가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고 원했어' 라는 우선순위 개념은 제 3자 입장에서 봤을때 결과값과는 전혀 아무 상관없는 개념인 것 (실제로 투입하는 시간 등에 연관관계가 있을 순 있겠으나) 인데도 주관적으로 느끼는 최선의 정도에 크게 기여하다보니, '내가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노력까지 투입한게 안 되다니! 다 안될거야!' 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이 사고과정에는 '세상은 정당하게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 자에게 결과를 줄거야' 라는 아까 말한 BJW와 같은 심리가 밑바닥에 깔려있다. 


세상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우선순위까지 파악해서 결과를 주지 않는다. 그런거라면 서울대를 향한 간절함대로 서울대에 가야지, 강남 8학군과 특목고가 대부분 서울대를 가는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어떤 교육/양육 환경은 어떤 시험에서 고득점을 내는 데 탁월한 효과를 낸다. OMR 카드지가 간절함을 알아주진 않는다. 모두가 간절하니까 붙은 사람들중에도 간절한 사람이 많아서, 간절함이 변수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 한 A에서의 결과가 딱히 최선을 다 하지 않은 B에서의 결과보다 아주 나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A에 대한 나의 한계이고, 나는 B에서는 더 잘 할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주관적 최선에 큰 영향을 미치는 '내 마음속 우선순위'는 결과에 필요한 변수가 아니기 때문이고 (오히려 너무 바라다 보면 긴장 불안 등의 요소로 인해 악영향을 미칠수도 있기도 하고), 두번째로 주관적 노오력이 정말 100%였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노력이 적확한 변수에 대한 공략이었는가를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에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히, 그 변수에 대한 공략 자체가, 바나나 마트 사장을 아는 일처럼,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최선을 다했을 때의 결과가 반드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결과값의 한계와는 같지 않다는 점이다. 김연아의 은메달처럼 그 결과가 '누가 보기에도' 부당한 결과인 경우일 수도 있다. 혹은 정말 필요한 분야에 필요한 노력을 투입해서, 정당하게 나온 결과가 내가 원했던 결과에 못 미칠 수도 있다. 요지는 이런 경우가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 '최선을 다했는데 이게 한계야' 라는 그 케이스일 확률이 낮다는 말이다.


3. 번아웃이 온다

노력과 별개로 최선을 다한다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해 ㅋㅋ 그 일과 관련된 일들에만 마음을 쏟다보면 번아웃이 온다. 어떤 것에든 그렇게 많은 멘탈 리소스를 쏟아버리면 쉬어야 하는 타이밍이 오기 마련인데, 이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 때문에 그 쉴 타이밍을 놓치니 더 큰 번아웃이 온다. 그러니, 그냥 시켜서 그런가보다 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난 서울대를 가고말거야 하면서 투지를 불태우며 공부를 하는 사람보다 멘탈이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결과가 더 좋을수도 있고. 물론 투지를 불태우며 하는데 결과가 좋아서 승승장구 할 수도 있지만, 안 그런 케이스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4. 더 큰 결과를 바란다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수도 있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게 너무 디폴트 값이라, 최선을 다하면  당연히 더더더 나은 결과가 나올거라고 자만했던 것 같다. 그게 결과적으로 내 정신적 건강 뿐만 아니라 실제 결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예를들면 내가 가진 모든 옵션에 겸허하지 못했다던지.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든지. 근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보다 중요한건 그 후에 남는 패배감인데, 최선을 다하면 A를 얻을 수 있을거야 라는 믿음이 이상하게도 과정 중에 와 이만큼 했으니 A++를 주지 않을까 라는 희망으로 바뀌면서, 원래대로면 A에서 B로 떨어지는 만큼의 충격일 것이 A++에서 B로 떨어지는 충격으로 둔갑해버렸다.




사실 아직도 박살난 멘탈 회복중이라 글이 깔끔하고 이쁘게 써지지가 않는다. 다만 배운 것은 있기에 그것을 잊지 않고자 한다. 나는 절대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되어도,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그것을 '하고자' 하는 내 자신이 가장 궁금했고 그리웠기에 앞으로도 그 '하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려고 한다. 하고싶고 원하는 것에 대한 마음, 최선을 다하는 나자신에 대한 열망, 그런것들에 대한 멘탈 리소스를 최대한 아껴서 실제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만 내 인풋을 투입하고 싶다. 돌아보니 실제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삶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멘탈도 멀쩡했던 것 같다. 나는 원래 해야하는 것이 있으면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고, 여기에 최선을 다하면 더 노력하니 더 결과가 좋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리소스가 다른데로 빠지면서 힘은 힘대로 들고, 결과에 대한 수용까지 어려웠던 것 같다. 물론 환경적인 요소들도 한 몫 했지. 코로나가 터지고 파트너가 있고 자리를 잡은 이민자들이나 혹은 여기 출신 학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립을 느꼈고, 돌아간 한국에서는 시차로 인해 새벽에 강의를 듣고 시험을 치며 신체적인 고통과 함께 ㅎㅎ 교수와 소통이 어려운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위해 나는 저들보다 등록금을 세네배는 (=유튜브 강의를 위해 1년에 이천만원 내는 현실) 내고 있었으니 그 스트레스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 결과가 날 신경써주는건 아니었고, 하고싶은걸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인정하지도 못해서 그걸 내게 유리한 쪽으로 (예를들어 자소서에 티좀 팍팍 낸다던지) 이끌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고싶은걸 한다라는 정당화, 생각, 행복해야한다는 생각 들이 나에게 정신적으로 무리를 줬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것들에 대한 생각을 차단시켰다. 예전의 나라면 당연히, 일말의 고민도 않고 자소서에 주루룩 써 넣고 면접에서 어필했을 것들이, 희한하게도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이런것들이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노력이 나에게 해 준 것이 있다면, 내게 주어진 추가 기회들을 내가 좀 날려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몇줄 남은 노력의 흔적들이 최소한의 선택지들을 내게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절대,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이게 내 한계'가 아니다. 이건 최선을 다하는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 노력까지 했기 때문에 주어진 기회인 것이다.


하고싶다고 생각했던걸 하고있으니까 정말 어려운데, 절대 최선을 다하지 말자. 최선의 결과만 바라자.

그리고, 원하던 것에 가까웠던 경험을 긍정하자. 그것이 우연이었을 리 없으니, 분명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그 때까지 멘탈과 체력을 잘 정비해서, 기쁨을 누릴 준비를 단단히 하고있자. 은퇴하고 죽기 전에 살았던 날들을 돌아보며 웃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성공인 것이지, 지금 커 보이는 하나 두개의 결과들이 절대로 인생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건 그 좋다는 결과들을 다 받아들고도 행복하지 못했던 내 과거가 너무 잘 말해주고 있지. ㅎㅎ 남들은 아마 미리서 배웠을 것들을 서른 넘어서야 배운다. 그래도 지금 배워서 얼마나 다행이야? ㅎㅎ 늦게 해 본 '최선'과 '실패'와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가르침들이 감사하고, 아직도 스스로 배우고 있는 내 자신이 대견할 뿐이다. 궁디 팡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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