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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Jun 19. 2021

행복한 캘거리

남겨두고 싶은 오늘 행복의 근거들

캘거리에 여름이 왔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입을 모아 말하던 여름의 캘거리를 드디어 본다. 기대보다도 더 아름답고 찬란한 날들의 연속이다. 아무래도 여기에 머무를 수 있는 날이 한달 남짓밖에 남지 않아서 인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다시 올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행복한 날들이다. 이 행복을 온전히 그리고 최대한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이 날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 행복이 지속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행복이, 캘거리 보우강 위를 뒤덮은 민들레 홀씨마냥 휙 날아가버리기 전에, 내 요즘의 행복한 하루하루들과 이 행복의 근거들을 남겨두려고 한다.


1. 내가 가고싶던 대학원의, 내 질문을 함께 경청하고 고민하는 교수님

엄청난 밀당 끝에 합격하게 된, 가고싶던 대학원과 이메일 올때마다 전남친 문자보다 더 내 마음을 쿵쿵 내려앉게 만든 교수님, 그리고 그 교수님의 연구실. 이런 것들이 생각만 해도 날 벅차고 설레게 한다. 두 달간 기다려 받은 합격 소식이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지 학교 캠퍼스 사진만 봐도 기말고사 기간에 받던 스트레스가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기대가 너무 커서 실망도 크지 않을까 걱정을 좀 했는데, 이제 겨우 2~3주 만났을 뿐이지만 왜 한달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될 정도로 지도교수님과의 미팅 하나하나가 너무 즐겁고 뜻깊다. 내가 궁금한 주제에 대해 마음껏 찾아보고, 내가 원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 정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가이드를 주려고 하는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이 있다. 랩 미팅에 가면 다른 학생들이 관심있어 하는 연구 주제 하나 하나가 모두 흥미롭다. 이전에 겪었던 연구실들은 이렇게까지 연구 주제가 찰떡같이 내 관심사가 아니었는데, 내가 흥미로워하는 주제를 다른사람도 흥미로워한다는게 상상 이상으로 즐겁다. 지적 호기심과 그것을 해소하는 기분도 있지만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를 드디어 찾은 느낌이라 그게 가장 나를 즐겁게 하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에서의 출발을 앞두고도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캘거리의 여름

2. 초록색 도시와 파란색 하늘, 길어진 낮시간

날씨와 일조량이라는게ㅡ 정말 무시 못하게 사람의 삶을 바꾼다. 도시가 완전히 바뀌었다. 4시 5시면 해가 지는 영하 20도의 겨울에서 밤 10시가 되어야 해가 지는 영상 15도~20도의 청량한 여름이 되었고, 마치 다른 도시라도 되는 듯 노랗던 벌판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황량해서 어두운 하늘을 그대로 비추던 나뭇가지들이 빛을 반사하는 수천개의 나뭇잎으로 뒤덮였다. 새들이 하루종일 지저귀고 바람은 시원하고 공기는 맑다. 날씨가 이러니 밖에 나가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고, 백신 접종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더 많이들 밖에 나온다. 2~30센치씩 쌓이는 눈에도 튼튼한 방한부츠를 신다가 쪼리를 신으니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달라진 것 같고, 더 많이 눈을 마주치고 더 많이 웃는다. 날씨 좋을 때 밴프 가는 길은 알프스 저리가라 할 정도로 아름답고, 겨우내 얼어서 하얗기만 하던 보우강도 반짝이는 에메랄드 빛으로 콸콸콸 기분좋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더 대단한 건 이런 아름다운 봄날씨 이후에 습하고 더운 여름이 오는게 아니라, 이게 여름이고 이 여름이 당분간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처음이 맞는 캘거리의 여름이 생각보다도 너무 아름답다는 것도, 마침 이 여름에 내가 졸업을 해서 바쁘지 않다는 것도, 백신 덕분에 밴프/캔모어로 가는 셔틀이 다시 운행하는 것도 모두 이 여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역시 가장 특별한 점은, 이게 (당분간은) 캘거리에서 맞는 마지막 여름이 될 거라는 점이다. 곧 떠날거라고 생각하니 구석구석이 다 예쁘고 특별하다.


3.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분명 날씨와 원하던 대학원이라는 외부조건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는 건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요새 자신의 삶에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몇 번 만나다 보니 더 절실하게 느낀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 할 때 언제나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기 때문에,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알게 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는 좀 안다. 나는 흔들리는 이파리 하나, 바람따라 넘어가는 구름 하나에 지나치게 감동받는 사람이고, 별 이유없이 뱉는 남들의 말에도 큰 폭으로 흔들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말이 지나치게 닿지 않는 환경에서, 때 되면 강가를 걸을 수 있는 일상을 사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꼭 맞는 행복인지 잘 알고, 그래서 복작거리는 환경에 있어야만 닿을 수 있는 것들, 예를들면 예쁜 카페와 가방과 이벤트 같은 것들이 그렇게 부럽지 않다. 나에게 중요한 건 남들 눈에 번듯한 옷과 차 집 직장 이런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는 환경과 그 환경 속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는 것이다. 나답게 살아도 되는 환경에 놓이다 보니 더더욱 느낀다. 아무리 사람들이 원하는 걸 갖다줘도 목이 졸리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24시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지금 완벽하지 않지만, 충분히 나다울 수 있는 상태에 있고, 그것이 지금의 내 행복에 아주 크게 기여하고 있다.

비오는 날 고영이와 함께 보내는 밤이 좋은 사람

4. 일거리가 꽤나 없는 상태= 워라밸

아르바이트도 하고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를 할 지 쳐다보고도 있지만, 당연히 학교를 다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업무량이 적다. 과제도 없고 시험도 없으니까. 게다가 졸업이라고 이것저것 세레모니도 해주고 상도 줬다. 그러니까 뭔가 아예 할일없이 노는 기분도 아니니까 무기력함도 없다. 학기 시작 전까지만 유효할 이 상큼한 워라밸의 행복.


5. 모든 것의 취약성

유한함이라고 표현하려고 했는데 아마도 vulnerability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인간의 삶도, 내가 갖고 있는 이 정체성도, 좋은 날씨도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도 모두 외부 변수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날씨가 너무 아름답다가도 강풍이 불고 비가 쏟아지면 어찌나 춥고 기분이 울적해지는지 모른다. 폭우가 내리고 얼음이 녹으면 아름답던 강물이 매섭게 불어서 위험해지기도 한다. 사소한 오해, 작은 갈등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평가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내가 나라고 자신하는 것들이, 로또 당첨 혹은 자연재해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일정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고 멍청한 생각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종합하면, 내가 지금 슬리퍼를 끌고 밖에 나가 아름다운 보우강 옆을 산책하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절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것도 아니고, 내게 영원히 있을 것도 아닌, 정말 찰나와 같고 또 바스라지기도 쉬운 연약한 완벽함이라는걸 안다. 그런걸 생각하면 그 모든 운과 때가 맞아 나에게 온 이 순간이 더더욱 소중해진다. 죽음 때문에 모든 삶이 의미없어지지 않듯이,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금방 바뀌기 쉬운 것인지를 생각하면, 행복한 순간은 더 없이 희귀하고 감사한 것이 되고, 불행한 순간은 또 언젠가 사라질 순간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어느정도 잔잔한 행복과 불행일 때 이야기지만. 어느날 보우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걷다가 생각했다. 내 미래가 불안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 흔하디 흔한 캘거리의 하루를 지나기 위해 한국에서의 모든 다리를 불지르고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까지 벅찰 수 있었을까 하고.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답기 위해 버리고 포기해버린것이 많은데, 희한하게도 그것이 그저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내가 버려버린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마음이 고대로 이 순간 행복에 얹어지는 느낌이다. 카페라떼 위에 아이스크림 한 스쿱 처럼.

친구와 함께 먹은 푸드트럭 타코, 내 손에 기대 잠든 따뜻한 뺨

6. 날 응원해주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은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많이 느낀다. 정말로 다른 사람을 응원해줄 수 있는 도량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함께 있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알게 되는 것 같다.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날 피곤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하고, 서로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럴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를 견제하고 혹시라도 나보다 잘 되지 않을까 혹은 쟤한테 얻어낼 게 없을까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 옆에 있다 보면 정말 별거 아닌 날씨 얘기와 일상 얘기를 했어도 집에 가는 길에 온몸에 힘이 빠진다. 아마 대학교에서 동아리에 든 이후 부터인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내 주변에는 정말 괜찮은 사람만 남았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좋은 사람들이어야 나를 견뎌내주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고 (ㅋㅋ), 일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정말 내 주위에는 가득하고, 너무 운 좋게도 캘거리에 와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도 내가 배울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 뿐이었다. 내가 A를 요청하면 그게 무색하게 ABCDEFG가 돌아왔다. 본인의 성과도 훌륭한 친구들이라 내 밴댕이 같은 속으로 부럽고 질투날 때도 있었는데, 만나서 얘길 하다보면 얼마나 그 성과가 어울리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그들의 성장이 어떻게 날 성장시키는지가 보이니까 도저히 그런 좁은 마음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뭔갈 해내도 주변의 질투와 시샘때문에 온전히 기뻐하기 어렵고, 또 그게 없어질까봐 불안하다는 한 친구의 말을 듣고 열등감으로 가득했던 내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지금 그렇지 않아서, 나이 서른둘에 대학교를 다시 졸업하고도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 있다. 가장 고마운 건 내 가까운 이들 중 누구 하나도 내 선택에 대해 의심을 갖거나 깎아내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기뻐하는 만큼 온전히 기뻐해준다. 대학교 가지고 뭘 그래? 라고 충분히 깎아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ㅎㅎ 학교 공부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징징댈 때마다 누구 하나 내 괴로움의 중요도를 절하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건지 얼마나 힘든건지 마치 내 옆에 있는 것처럼 이해해주는 사람들밖에 없었고, 대학원에 붙었을 때도 혹은 가장 원하는 곳 결과를 기다리며 나머지 옵션을 놓고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을 때도 진심으로 나와 함께 걱정과 고민, 그리고 기쁨을 나눠주던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있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사람일 거라고 조금은 자신있게 생각할 수 있다. 그들 덕분에 내 작은 성과에 뿌듯해 할 수 있고, 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밴프 캔모어의 대자연은 말 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 꼭 살고싶은 도시 캔모어
유속이 엄청났던 존스턴 캐년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캐슬 마운틴
밴프 시내

7. 대자연

캘거리에  가장  이유, 풍경을 압도하다가도  전체를 씻어버리는 것만 같은 끝도없는 록키 산맥과,  산맥에 숨어져 흐르는 빙하 녹은 강물과 호수들이 지척에 있다. 말도안되게 아름다운  풍경을 한달에 몇번이고   있다는게 내가 가져선 안되는 특권처럼 느껴진다. 대로의 나도 좋지만, 거기 있는 나는 더더욱 좋다. 주중엔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연구질문을 생각하다가, 금요일에는 눈앞에 펼쳐진 록키와 보우강에 껌벅 정신을 잃는다. 주말엔 10시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손님들하고 적당히 수다를 떤다 (여기의 일꾼들은 별로 좋지 않지만 희한하게도 가끔은 얼마나 내가 운좋은 사람인지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디든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지구상의 그것이 아니다.


10년 전 워싱턴 디씨에서 인턴을 했을 때, 너무 아름다운 디씨의 봄 풍경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인품 좋은 사람들만 모아놓은 것 같은 일터와 나와 유머코드와 자학성까지 똑닮은 친구까지, 이렇게 모든게 완벽한 날들은 아마 내 인생에는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게 기억난다. 그래서 매일 나무가 조로록 늘어선 내셔널 몰을 걸으며 이 풍경을 잊지 말고 추억해야지 생각했었다. 모든게 완벽한것만 같은 날들이 다시 오니까, 어쩌면 사는 동안 이런 순간들을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정말 좋고, 아니어도 할 수 없고. 그 모든 겨울이 지나 드디어 봄, 그리고 기다리던 캘거리의 여름이 왔다. 나는 생각한 것 보다 더,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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