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성녀 보니를 생각하면서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1980년 중반 써니브룩 헬스센터에서 일할때 였다. 나의 직분이 캐주얼 파트타임이라 시도 때도 없이 병원전체의 간호사가 필요할 때 나는 그 사람들의 빈자리를 메꾸는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 병원은 토론토 의과 대학 부속병원이고, 최대규모의 교육병원중 하나로 호텔같이 의료 시설을 꾸며놓고 약 1000명( 현재)의 입원 환자를 보유한 최 첨단 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당시 유일한 자체의 헬리콥터도 있어 트라우마 센터로서 의대생들의 교육도 겸하면서 캐나다에서 최고의 교육병원이었다.
나는 약 2년을 병원 전체의 간호사가 부족한 병실을 보충해 주는 일을 가정 형편상 하고 있을 때 병원에서 캐주얼 직원들에게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정착(Decentralized)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었다. 그때 나는 제1 순위로 Trauma Unit에 신청을 했다.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이곳을 한번 다녀가면 다시는 오려고 하지 않는 병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을 신청했으니 제 일호의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졌다.
나는 Bonnie라는 간호사를 그곳에서 만났고, 그 녀와 같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 그곳에 한국 간호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어쩜 나를 피해 다녔고 한 번도 당신이 “ 한국사람이냐고” 물어온 적도 없었다. 그때 나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했다. 내 입장 같았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협조해주려고 했을 텐데. 혹시나 자기에게 피해가 올 까봐 그랬는지 그 이유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동족보다 이 백인 여성은 언제나 따뜻하고 변함없는 표정으로 자기 일 외에 남을 도와주곤 하여 나를 감동시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만난 수많은 동료들 중에 보기 어려운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곳 일이 아무리 힘든다 해도 그녀와 같이 일할 수 있다면 나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일 터란 과중한 일이 문제가 아니라 늘 인간관계가 힘들 때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미소와 연민으로 환자 간호를 해주었고, 누구의 부탁도 거절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 병실의 일은 외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힘든 일을 감수해야 하루의 일이 끝났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는 완전히 육체가 탈진 상태였다. 더 이상 간호라는 전문직을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후 떠났다. 왜냐하면 이곳은 신경외과로서 캐나다 전역에서 대형교통사고, 뇌출혈로 인해 심한 신경 손상을 입은 환자들이 주로 헬리콥터로 운반되어 왔고, 아니면 뇌종양, 뇌 암 등으로 입원해 있는 엄청난 과 체중( 200 -300 LBS)과 몸에 부착된 장비들이 환자들을 돌보는데 보통 거치장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에 따른 간호도 턱없이 힘들기에 누구도 다시 오고 파 하지 않는 병실로 유명했다. 그 결과로 간호사가 견디지 못하고 그 병실을 떠나가는 율은(Turn over) 일 년에 100%가 넘다고 일러준 곳이었다.
보통 새로 온 간호사가 6 개월이 되어 조금 일할 수 있게 되면 떠나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으니 병원 측의 자금 손해는 가히 상상을 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2주 동안 병원 안내 교육을 받는 동안 일하는 사람과 동일하게 월급을 지불받았는데 적어도 4 년 반을 그곳에서 일을 해주고 떠났다. 이병원의 긴 교육과정은 새로운 사람들을 충분히 교육시켜 내 직원으로 만들어서 종업원으로 인해 오는 병원의 불상사를 미리 막기 위해서 하는 현명한 정책이었지만, 그 결과 병원 측은 많은 자금을 투자한 셈이었다. 그래서 나도 많은 것을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체득할 기회가 있었다.
이곳은 그 당시 최첨단의 기술로 다른 병원에서 보지 못한 장비들을 다 갖추어 놓고 캐나다 어떤 병원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총상으로 인해 파괴된 얼굴과 신체 어느 부분이 손실되어 들어오는 사람들, 심한 교통사고로 인해 완전히 마비된 사람, 뇌질환을 가지고 들어와서 계약 없이 우리의 손을 기다리는 외로운 환자들, 일 년 내내 보호자 한번 찾아주지 않는 불쌍한 환자들은 늘 내 마음에 연민의 대상이었고, 회복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은 것이 그렇게 오랬 동안 떠날 수 없게 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병실에 28세 된 덩치가 크고 인물이 준수한 젊은 청년이 다이빙 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우리몸의 모든 움직음을 관장하는 척추 윗 부분이 부러지면서 신경이 손상되어 눈짓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결과 자가 호흡도 힘듦으로 기관 절 개을 하여 호흡을 도와줘야 했고, 몸에는 외부에서 주입된 영양분을 넣어주는 호수, 소변을 배출시키는 호수와 정맥주사를 주는 줄들이 온몸을 다 감고 있어야 생명이 하루하루 유지될 수 있었다. 목에서 차이는 가래는 쉬지 않고 제거해주어야 호흡을 할 수 있었고, 그에게는 한 간호사가 24시간 곁에서 집중적인 간호를 해줘야 하는 그런 중환자였다. 내가 그 환자를 맡는 날은 파김치가 되어서 견딜 수 없는 두통을 안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 당시 나는 일의 스트레스로 심한 편두통을 앓고 치료를 받던 중이었기에 매일 겪던 그 괴로움은 이직업을 떠나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도록 만든 이유중에 하나였다.
캐나다는 다이빙으로 척추 손상을 입는 환자가 상당히 많은 숯 자라 한다. 그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고 장래를 바라보고 희망에 찼던 젊은 청년은 이렇게 하루아침에 혼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해주는 사랑의 간호에 그는 눈짓 하나만으로 감사를 표시하곤 했다. 그 외 그의 회복을 측정하는 신경손상을 모니터 하는 일이 뒤따랐다. 그 병실의 간호사 들 모두가 그에게 연민을 가지고 특별히 간호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을 그를 위해 바치겠다고 나설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리 사랑하던 가족의 한 사람이 그런 상태가 된다 해도 장 기간 간호는 가족과 사회에 엄청 부담을 주는데 Bonnie는 그에게 직업을 떠나서 자기의 모든 것을 , 아니 일생을 다 바치기로 각오했다 한다. 그녀가 그에게 해준 간호는 우리가 그에게 직업적으로 해준 것과는 달랐다.
그녀의 지극한 간호에 그의 회복은 빨랐다. 10 개월 후에 그는 휠체어를 탈 수 있었고 적은 움직임이 손끝에서 일기 시작했다. 자동 휠체어 조종 버튼에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우리 곁을 떠나서 Lynhurst 라 부르는 캐나다에서 제일 큰 신경손상 재활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때 Bonnie는 그와 함께 아무 미련 없이 그곳으로 함께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긴 회복기간을 지난 후 퇴원을 했고, 두 사람은 평생 동안 함께 살 것을 약속했다 한다.
그리고 Bonnie는 휠체어 남편을 아침이면 목욕을 시켜 먹이고 준비해서 대학에 강의실로 가서 강의 을 듣고 논문을 대신해주고, 졸업을 시켜서 베리라는 마을에 장애자 기구 상점을 운영한다고 전해 들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청년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치겠다고 한 그 결심, 그 녀는 내 가슴속에 영원토록 살아서 메아리쳐 오는 살아있는 나의 친구이며 성녀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다.
Bonnie가 보고 싶어 온다.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때 그 마음 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는지 … 그녀는 나를 잊었겠지 만 나는 그녀가 내 가슴속에 각인된 친구로 잊을 수가 없다. 나도 그때 만난 신경과의 최고 의사들이 그 후에 나의 남편의 생명의 은인들이 되었다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기적은 이런 모습으로 내 삶에 찾아왔었다.
2012-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