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남편에게 드리는 사랑의 조사
제가 당신을 만난 곳은 1968년 스카보로 센테니얼 병원 외과 병실이었지요. 온타리오 공인간호사(R.N)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저는 무거운 원서 책들과 매일 씨름하고 있을때 였고, 서툰 영어 때문에 힘들게 보내던 시기였습니다.
캐나다 가장 혹한의 계절 2월,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다가 어떤 동료 부탁으로 한국환자의 통역을 마치고 나왔을 때 반대편에서 동양사람 다섯 분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지요. 50년 전, 동족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요? 저처럼 머리카락이 검은 그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저를 보고 반갑게 다가왔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이었어요.
그 당시 당신은 이민자로서 드물게 자동차를 가졌고, 그 차로 한인들에게 운전봉사를 많이 했다고 일러 주었지요. 그날도 당신은 어떤 부부와 환자 친구를 태우고 병원 방문을 왔다가 우연히 저를 만나게 되었지요. 기억하나요? 기숙사로 가려는 저를 붙들고 더 이야기 하기를 간절히 원했지요. 얼마나 외국생활이 외로웠는지 상상이 가네요. 아니면 그 순간의 만남이 우리의 운명이었나요?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출발했고 9 개월간의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은 후 제 인생에 없던 결혼이란 매듭을 짖고, 1969년 천고 마비의 어느 가을날 고종옥 신부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래서 축복의 두 자녀들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50년이란 길고도 짧은 세월을 당신과 함께 하며 노후 마무리를 고민하던 중 척추문제가 우리의 삶을 바닥으로 몰고갔지요. 그런 와중에 그 이듬해에 청천 병력같은 담도암 말기라는 무서운 병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당신을 위해서 할수있는것은 다 해드리고자 했어요. 그때 가족들은 당신의 제한된 삶의 시간속에 정신을 잃었고, 그러는 사이 세월은 빨라 3개월이 흘렀고 당신은 지난 15일 홀연히 가족곁을 떠났습니다.
기억하나요? 결혼식 날 당신의 뛰어난 조크가 온손님들에게 얼마나 큰 웃음을 선사했는지... 저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동안 소모한 자동차연료가 9개월간 무려 9배럴이나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신부님외 저의 어머니와 가족들과 내빈들을 크게 웃게 만들었지요. 당신의 유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빛나는 것을 처음 본 순간이었어요.
당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유머와 재치는 주위분들에게 지루함 대신 늘 신선한 웃음을 선사하곤 했어요. 오래전에 본당 신부님이셨던 최 몬시뇰 신부는 “백용빈 씨의 순발력을 토론토에서 따를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라고 농담 반 진담을 늘 하곤 하셨지요.
베드로, 당신은 참 따뜻하고 재치가 넘치는 소유자였어요. 제가 센테니얼병원에서 토론토 시내에 사시던 어머니와 언니댁을 방문하려면 허허벌판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또 2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그런 불편을 없애준다 하면서 저와의 만남을 계속해 왔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시간들은 새땅에 나의 삶의 뿌리를 내리는데 얼마나 행복한 시간들이었나 생각을 해봅니다. 그 시간들은 잊을수없는 즐거운 추억이며 동시에 제 마음속에 잊지못할 행복했던 시간으로 간직하고 있지요. 당신은 부끄럼이 많고 순박한 저에게 도움이 돼서 본인이 더 기쁘다고 일러주곤 했어요.
그런데 신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신에게 육체적 고통이 찾아 왔지요. 첫 딸이 갓 태어난 후였는데 나약하고 겁 많던 저에게는 만만치 않은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은 현대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는 고통을 평생 같이 하는 또 하나의 동반자로 삼았지만 긍정적 성격과 인내, 인간고통에 대한 이해로 이겨내곤 했습니다.
소극적이고 급이 많았던 저는 한번에 운전면허를 받았으나 5년 동안 하이웨이를 무서워서 나가지 못한 저에게 당신은 아낌없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운전 중 어떤 실수를 해도 나무라지 않았으며 “괜찮아”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늘 저의 부정적인 시각과 불안한 정서, 수동적 사고를 나무람대신 항상 격려해 주었어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지혜를 준 평생의 동반자요 멘토를 오늘 먼저 보내드립니다.
겸손한 인품 때문에 당신은 음악적 재능을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았지요. 당신 누님은 성악전공자요, 형님은 배재학당에서 밴드부 지휘를 한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다고 들었지요. 당신은 기타와 하모니카외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연주했지만 가족 외에는 그걸 아는 사람이 있나요? 당신은 밖으로 드러낼 실력이 안된다면서 그런 말을 입밖에도 꺼내지 못하게 했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가족을 위한다며 언제나 준비된 모습으로 다양한 레프토리로 들려줄 땐 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뿐 아니라 자타가 인정하는 뛰어난 순발력과 언어구사(영어, 독어)로 동포사회의 명사회자로 봉사한 세월이 20여년이 넘게 해 왔지요. 캐나다 미스코리아 대회 같은 동포사회 큰 이벤트나 결혼식 같은 작은 가족행사에 기쁘게 출연하면서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만들었지요. 당신이 사회를 맡아본 토론토 행사가 얼마나 많은지 셀 수가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수없는 척추수술 탓에 당신이 50대 초반에 은퇴하고 김승순 음악지휘자 겸 작곡자님을 만나 예멜필하모닉소사어티의 이사장으로 자신의 재능을 13년을 봉사한 것도 삶의 크다란 자국을 남기는 당신의 발자취이라 말할수 있어요. 이 기간은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보람된 일을 하던 시기였다고도 말하고 싶어요.
세월과 함께 당신의 육체적 고통은 더욱 심해져서 갔지만 그런고통속에서도 쉬지않고 사회봉사을 하였지요. 그로인해 조기 은퇴을 하게되었고, 그 후 제가 오랜세월 전문 간호사 공부를 계속할때 당신은 날 태워다 주고 또 픽업을 해주었어요. 결혼 전 데이트 때와 같이 운전기사가 되었지만 그런 봉사는 당신에겐 기쁨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아빠가 되려고 고심하면서 몸소 실천한 관대한 아버지였고, 한가정에 남편이었지요. 지난 수십 년간 6 회의 척추수술을 받았지만 2016년이 우리 가정에는 가장 힘든 해였습니다. 장기간의 재활로 회복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요 ? 생각지도 않은 암 선고를 받고 저희 가족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하려고 두아이들이 먼곳에서 자기들의 직장을 뒤로하고 아빠의 고통의 시간을 함께하려고 날아왔지요. 모든 치료는 당신 희망대로 의료팀과 상의해서 결정했고, 나머지 삶의 마지막 마무리도 당신 의견을 최우선으로 했지요.
당신은 암병동에서 정해진 시간을 살면서도 가족에게는 80 평생 이만하면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들려주곤 했어요. 그러나 5년만 더 살아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 제 가슴을 짖누르면 아파오네요. 함께 가자던 그약속은 우리가 희망 사항일뿐이었지요. 삶의 선물은 주신분에게 있으니 순리로 받아드려야 살아있는사람들이 남은 생을 잘살고 떠날수가 있지요. 그래도 당신이 저를 만나서 살아온 지난 50년이 행복했다고, 그리고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남긴 말은 저에게 큰 위로로 새겨져 있어요.
크진않은 체구을 가진 아빠였지만 철학자 칸트처럼 사고력은 거인 같던 당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의연했고, 가족에게 용기를 주며 시련을 극복했지요. 죽음을 재촉하는 3개월의 암병동 생활에서도 방문자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미소 지었고,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의식이 돌아오면 유머를 되찾아 간호사 등 의료진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요. 방문자들에게는 꼭 커피와 식사를 대접하라는 말을 저에게 일러주곤 했지요. 베드로 당신은 선하고 착한 마음의 소유자, 그리고 방문온 모든 친구들에게 행복을 남기고 간 사람이라고 그들에게 심어주고 떠났지요.
긴 삶의 여행을 마치고 종착역에 온 베드로, 부디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
평생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살아온 아내 젬마가.
2018년 4월 18일 장례식에서 아내가 드리는 사랑의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