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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나로 Jun 20. 2023

스스로를 정의하지 말 것

심리상담 10회기 후기

나를 설명할 말은 너무도 많아 (출처: Jenny Cipoletti)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심리상담을 받았다. 매주 한 시간씩, 총 10번이었다.


상담을 신청할 당시의 나는 너무 막막했다.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던 회사를 나와서는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쓰던 중이었다. 소설을 다 쓰고 나면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 할 지도 고민이었고, 앞으로 뭘 해 먹고살아야 할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만 살아도 되는지도 고민이었으며, 회사라는 곳에 전형적으로 있는 인간 군상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 가득한 상태였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성향 때문에 회사를 가기 싫은 것인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회사를 가기 싫은 것인지, 어쩌면 회사를 가기 싫은 건 너무 당연한 건데 내가 너무 물렁한 건지조차 고민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상담을 진행하기 전, 상담을 받고 싶은 내용에 대해 500자 이내로 간단하게 적는 절차가 있었다. 나는 줄이고 줄여서 쓴 고민이 500자를 한참 넘겨서 그 뒷부분이 잘렸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상담사님을 통해 알게 됐다. 그렇게 꾹꾹 눌러 적은 고민의 핵심은 황당하게도, 위에 늘어놓은 고민과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어요’였다.


상담을 하면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해답을 상담사님께서 제시해 주실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거의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만났던 상담사님은 내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더 귀한 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상담사님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 기질과 성격은 어떠하며, 내가 어떻게 자라 왔는지, 내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를 알아갔다.


상담사님은 ‘거울’이 되어 주셨다. 나는 거울을 이용해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을 왜곡하지 않고 진실되게 비추어 보았다. 상담사님도 그러길 바라셨다고 믿는다. 어린 내가 느꼈던 감정,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해 보며 고민에 대한 많은 해답을 스스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왜 위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프레임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안정된 마음이 들게 한다. 그래서 안정을 느끼기 위해 프레임에 기대어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라며 손쉽게 한마디로 자기소개를 마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지금의 나는 이런 모습이지만, 언젠가는 내 밑에 깔려 있는 또 다른 모습들이 드러나며 나를 더욱 빛나게 할 수도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 왔던 기대도 의식적으로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높은 기준을 부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래서 항상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다른 사람의 어떤 면이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매우 실망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안다.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매주 한 번 하던 화장실 청소를 2주마다 한다고 해서 화장실을 못 가는 건 아니니까. 매일 원고를 A4 두장씩 쓰지 못한다고 해서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아니니까. 어떤 날은 덜 하고, 어떤 날은 더 할 수도 있는 거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감정을 잘 들여다보기로 했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면 알아봐 주기로 했다. 불안, 분노, 우울을 포함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감정들이다. 내가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이 감정들이 올라올 때마다 있는 그대로 봐주고,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며 내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상담 없이도 잘 살아간다. 상담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상담사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네 인생은 빨랫줄에 널린 천과 같으며, 상담은 이곳저곳이 매듭지어져 있는 천을 자유롭게 해 주는 과정과도 같다. 묶여 있는 천일지라도 빨랫줄에 널려 있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천의 어느 부분에 매듭이 지어져 있는지 알고, 그 매듭을 하나둘씩 풀어나가다 보면 천은 더욱 자유로워진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너울거리며 춤을 출 줄도 알게 되며, 햇빛이 내리쬐면 자기 색깔을 더욱 예쁘게 빛내고, 장마가 오면 습기를 머금고 잠시 눅눅해질지언정 비가 그치면 금세 제 색깔을 찾고 자유롭게 흩날릴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담을 받으면 스스로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더 자유로운 내가 될 수 있다.



상담 직후마다 기억하고 싶은 대화와 느낀 점을 조금씩 써 뒀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문장을 몇 줄 발췌한다.

(같은 말을 듣고도 다르게 느끼며 기억하듯이, 상담사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는 아닐 수 있음)   

글쓰기 자체에 만족한다면 독자가 없어도 괜찮아야 한다. 하지만 독자를 고려한 글쓰기라면 독자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

직업의 3요소는 흥미, 적성(능력), 가치(수입)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행복하고 재미있는 순간이 많지만, 아직 소설가로서의 적성과 가치를 알 수 없다. 만약 그 둘이 떨어진다면 다른 직업으로 채우자. 잘하는 일로 수입을 올리자.

나에게 글쓰기란, 내 머릿속의 시끄러운 것들을 받아 적을 수 있는 도구이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정리해서 보여줄 수 있는 매개체이다. 그래서 글이란 누군가의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수단과도 같다.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여건도 돼서 글을 쓰고 있다.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내가 처음에 어떤 생각으로 글을 쓰게 됐는지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 그걸 떠올려보자. 나중에 생각이 바뀌게 돼서 글을 더 쓰고 싶거나 취업을 하고 싶다면 그때 마음 가는 대로 하자.

내가 정말 힘들고 내 맘대로 안 되는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남의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하자. 남이 도움을 요청할 때 내 기준을 들이대지 말자.

나는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 안에 사회적으로 1인분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라디오가 있다. 근데 1인분 못하면 어때서?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하다. 그거면 됐다.

어떤 일을 했을 때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인식하고 있자.

이성이 감정을 누르기만 하는 이유는 감정을 다루는 연습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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