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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Apr 24. 2024

수십 개중 골라온 그 컵

해외 학회 출장이 잡혔다는 남편의 말을 자마자 영문 명함을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외국 포닥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박사 졸업 직후이기에 업데이트된 명함이 있으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필요 없다는 자를 구슬려 부랴부랴 시안 수정을 하고 마침내 출국 전 날 택배로 수령했을 때, 부적 200장이라도 되는 양 얼마나 든든하던지. 원래 쓰던 만 원짜리 선글라스가 웬 말이냐 싶어 새것을 사주고, 소매치기 조심하라며 힙색도 골라주었다.



일주일 후, 남편이 귀국길 공항에서 연락을 해왔다. 기념품 가게인데 마음에 드는 게 있냐면서 사진과 함께. 주욱 확대해서 보다 보니 마음에 드는 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다 예쁘다~ 오빠는 뭐가 제일 예뻐 보여?"


내 취향을 맞출 수 있을까 궁금해져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난 이거 두 개 정도가 괜찮은데?"


완전 신기하게도 보내온 두 장의 사진 중 하나가 마음속으로 골라둔 것이었다. 이 많은 컵 중 딱 저걸 고르다니..! 우리 사이에도 비슷한 구석이 있긴 있음에 울컥하며 순간 엄청난 위안을 받았다. 


우리 취향에 교집합이 있구나..ㄷㄷ


컵을 만날 생각에 비좁은 부엌에서 토종닭을 삶으면서 많이도 설렜었다. 진짜 기다렸던 건 같은 컵을 골랐던 기특한 남편이었을 거고.




무사히 돌아와 기름장에 닭을 찍어먹는 남편에게 만들어준 명함은 썼는지 물어보았다.


"한 장도 쓸 일 없던데?"


역시나 칼 같은 대답을 하곤 덧붙인다.


"그니까 필요 없댔잖아~"


큰 마음먹고 사준 선글라스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애들이 중국인 같다는데?"


그냥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말문 막히는 대답이지만, 생각해보면 남편은 정말 무언가 바란 적도, 요구한 적도 없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남편에게 해준 것일 뿐.




그날 저녁, 남편은 박사 졸업 논문 인쇄가 다 됐다며 검은색 양장 한 권을 건네왔다. 맨 앞 장에 편지를 써주는 것이 전통이라 덧붙였는데 카드나 편지를 받아본 지 오래라 기대가 됐다.



우리의 울고 웃는 순간들을 안고, 혹은 잊어가며(혹은 별생각 없이;;) 연구실에서 남편이 흘렸을 땀들이 담긴 한 권을 마침내 펼쳤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서툴지만 정성스레, 그리고 생각보다 빽빽이 채워진 맨 앞 장은 당시 여기저기 긁혀있던 마음을 삽시간에 덮어주기 시작했다.


우리 관계 V자 반등의 시작


묘하게도 남편이 써 준 그 한 장의 마음을 읽은 후, 나는 조금씩 덜 '오버' 하게 되었다. 반응과 표현을 갈구하느라 요구하지 않는 케어를 남발해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깨달은 것이다. 티가 나지 않을 뿐, 그도 다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 


그래도 틈새를 비집고 가닿곤 하는 챙김이 있는데, 받다 보면 익숙해지고, 고맙고, 나도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은 아직 놓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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