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학회 출장이 잡혔다는 남편의 말을듣자마자영문 명함을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외국 포닥자리를 알아보는 중이고 박사졸업직후이기에 업데이트된 명함이 있으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필요 없다는자를 구슬려 부랴부랴 시안 수정을 하고 마침내 출국 전 날 택배로 수령했을 때, 부적 200장이라도 되는 양 얼마나 든든하던지.원래 쓰던 만 원짜리 선글라스가 웬 말이냐 싶어 새것을 사주고, 소매치기 조심하라며 힙색도 골라주었다.
일주일 후, 남편이 귀국길 공항에서 연락을 해왔다. 기념품 가게인데 마음에 드는 게 있냐면서 사진과 함께.주욱 확대해서 보다 보니마음에 드는 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다 예쁘다~ 오빠는 뭐가 제일 예뻐 보여?"
내 취향을 맞출 수 있을까 궁금해져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난 이거 두 개 정도가 괜찮은데?"
완전 신기하게도 보내온 두 장의 사진 중하나가 마음속으로 골라둔 것이었다. 이 많은 컵 중 딱 저걸 고르다니..! 우리 사이에도 비슷한 구석이 있긴 있음에 울컥하며 순간 엄청난 위안을 받았다.
우리 취향에 교집합이 있구나..ㄷㄷ
컵을 만날 생각에 비좁은 부엌에서 토종닭을 삶으면서 많이도 설렜었다. 진짜 기다렸던 건 같은 컵을 골랐던 기특한 남편이었을거고.
무사히 돌아와 기름장에 닭을 찍어먹는 남편에게 만들어준 명함은 썼는지 물어보았다.
"한 장도 쓸 일 없던데?"
역시나 칼 같은 대답을 하곤 덧붙인다.
"그니까 필요 없댔잖아~"
큰 마음먹고 사준 선글라스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애들이 중국인 같다는데?"
그냥 다 잘 썼다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말문 막히는 대답이지만, 생각해보면 남편은 정말 무언가 바란 적도, 요구한 적도 없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남편에게해준것일 뿐.
그날 저녁, 남편은 박사 졸업 논문 인쇄가 다 됐다며 검은색 양장 한 권을 건네왔다.맨 앞장에 편지를 써주는 것이 전통이라 덧붙였는데 카드나 편지를 받아본 지 오래라 기대가 됐다.
우리의 울고 웃는 순간들을 안고, 혹은 잊어가며(혹은 별생각 없이;;)연구실에서 남편이 흘렸을 땀들이 담긴 한 권을 마침내 펼쳤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서툴지만 정성스레, 그리고 생각보다 빽빽이 채워진 맨 앞 장은 당시 여기저기 긁혀있던 마음을삽시간에 덮어주기 시작했다.
우리 관계 V자 반등의 시작
묘하게도 남편이 써 준 그 한 장의 마음을 읽은 후, 나는 조금씩 덜 '오버' 하게 되었다. 반응과 표현을 갈구하느라 요구하지 않는 케어를 남발해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깨달은 것이다. 티가 나지 않을 뿐, 그도 다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
그래도 틈새를 비집고 가닿곤 하는 챙김이 있는데, 받다 보면 익숙해지고, 고맙고, 나도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은 아직 놓지 못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