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상반기의 방황 로그
0.
2024년의 절반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는데,
꽤 긴 방황 끝에 정신을 좀 차렸습니다.
1월부터 회사 일이며, 불화며, 피해 사실 증명이며..
겪고 있었던 일들로 인해 일상에서 대체로 느껴지는 건 무기력함이었고
게다가 연기 훈련마저 온통 머릿속에 물음표들로 가득 차 있어 오리무중이었던 바
어찌저찌 다른 시도들 끝에 조금은 정리를 하며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좋은 연기란 무엇일까.
작년 말부터 고민해 왔다.
메소드연기워크샵에서 훈련을 한 지 약 1년이 되었던 시점이었고,
이제는 훈련도 훈련이지만 개인 독백을 잘 준비해 둬야 겠다는 생각이 앞서던 때였다.
한예종 전문사를 짧게나마 혼자 준비를 했었는데
개인독백영상을 100번도 넘게 촬영을 해 보면서 스스로가 수없이 갸웃대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독백영상.
진실을 더 말하자면, 매 영상마다 들쭉날쭉한 몰입의 정도가 내 실력을 말해주고 있었고,
이 들쭉날쭉한 몰입 수준과 매무새를 어떻게 만져나가야할지 막막했다.
배우가 되고 싶은 이유는
연기를 함으로써 청중에게, 관객에게, 시청자에게 감정을 전달하고 싶기 때문인데
그들에게 무언가를 느끼도록 하려면 정말 좋은 연기를 해야 한다.
연기는 사실 거짓말 놀이이기도 할테고, 역할놀이이기도 할텐데
좋은 연기란 허구인 게 들통 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좋은 연기란,
어쨌든 캐릭터와 상황이라는 틀 안에서 배우의 진정성을 녹여내 전달하는 것인데
나의 의도나 생각이 강하게 개입되는 순간 캐릭터가 아닌 '나'의 의식이 고스란히 전달돼 버린다.
그러다가 진정성의 단초를 발견하는 사건이 연달아 있었다.
2.
국립극단의 <천개의 파랑> 관객 낭독극에 당첨되어 참여하러 갔던 적이 있다.
당일에 도착한 순서대로 역할을 랜덤 추첨하여 낭독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보경'이었다.
'보경'은 젊은 시절 배우를 꿈꿨고 촉망받는 신인이었지만 화재사고로 꿈을 접고 한 남자와 결혼하게 된 인물이다.
(TMI지만 당시 헤럴드 거스킨의 <연기하지 않는 연기>를 읽고 있었고, 그 책에 나오는 대사 떼어 읽는 훈련을 을 낭독모임에서 연습해 보자는 나만의 소기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대사를 떼어내 읽는 훈련의 첫번째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텍스트를 본 그 즉시 느끼는 대로 내뱉는 것이다.
'보경'의 대사 중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라는 대사가 있었다.
대사를 보자마자 나 스스로는 내 안에서 뜨겁게 들끓는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대사를 툭툭 내뱉으며 빠르게 낭독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갔다.
장작 2시간에 걸친 낭독 시간을 마치고 연출님과 참여한 관객들의 회고 시간이 있었는데,
연출님이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보경역 하신 분, 혹시 배우가 꿈이세요?"
나는 아무런 힘도 주지 않았고, 즉 의도도 하지 않고 대사를 내뱉았다.
처음보는 대사였고, 대사를 본 순간 내 안의 들끓는 뜨거움이 있었기에 오히려 들키지 않으려 조금 억눌렀다면 억눌렀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진실된 어떤 부분과 '보경'이라는 인물의 특성이 일치되는 지점에서,
듣는 사람은 진정성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캐릭터의 모든게 내 이야기일 순 없다.
나의 이야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부분이 아닌 것도 공통지점을 극대화해서 드러내보이는 일.
그렇게 훈련하는 게 지향점이 되어야겠다.
단, 수많은 연습을 통해 균질한 수준의 연기를 수차례 라이브(Live)로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균일한 연기는 절대 아니다.
3.
연기를 배우는 장소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처음 3개월 정도는 한 엔터사 산하의 연기 수업에 가게 되었다.
여자선생님은 처음이라 색달랐고,
확실한건 여자 캐릭터의 복합적인 감정의 결에 대해 피드백을 주어서 좋았다.
하지만..
엔터사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20대 극초반의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배우들을 주로 찾던 곳이라,
나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30대니까.^^
20대의 순수+깨끗과 30대의 순수+깨끗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지향점은 마냥 해맑은 천진난만 유형의 캐릭터가 아니고, 그게 맞지도 않고, 20대 배우 지망생들에 비해 차별적인 강점도 아니기도 하고.
그래도 깨끗한 이미지로 생각해서 먼저 연락이 온 거니 감사하고, 나의 이미지에 대한 부분을 그래도 파악할 수 있는 때였다.
4.
그리고 움직임도 배워봤다.
작년 한예종 전문사 이후 처음인데, 사실 이번엔 움직임 <<< 창작안무 쪽이긴 했다.
춤도 못 추고 심지어 움직임도 작년에 그렇게 쩔쩔맸는데 창작안무 수업이라니!
움직임 수업과 달랐던 점은
1) 가사가 있는 노래를 지정해 주셨고
2) 가사든 박자든 뭐든 맞춰서 무언가를 표현해 내도록 가이드 해 주신 것이다.
정말 어렵.. 그거슨 홀뉴월드
나 춤 못 추는건 알고 있었지만
나의 상상에 있는 내 몸짓과 실제 표현되는 몸짓 사이의 아주 큰 괴리감에
매수업 촬영한 발표시간 나의 영상을 다시금 보면서
아주 헛웃음을 많이도 지었던 시간들이었다.
표현해 내는 수업 자체는 너무 좋았다.
선생님도, 수강생분들도, 너무너무 좋았음..
엔터사 연기수업 이후 또 깊은 고민에 빠져 정체기를 겪던 차였고,
회사에서도 너무 극심한 관계 스트레스로 무기력함의 절정에 달했던 때였는데
첫 수업 시간에 자기소개를 돌아가면서 하는데
같이 모인 사람들이 지향하는 지점이 비슷하다는걸 알아채면서 극도의 도파민이 뿜어져 나왔단 것.
그래서 다시금 깨달았지.
'아,.. 이거였지. 내가 이래서 배우 하려 했지.'
이유 없이 좋아하는게 느껴지는 분야, 이건 뭐 어쩔 수 없어.
선생님 말씀대로 '예술하고 싶어 하는 병은 어쩔 수 없는거야!'!!
5.
수업 한 달 이후 돌아가 전문사 준비하는 입시를 할까 하다가
결국 나는 매체연기를 목표로 하는데 빠른 길이 좋지 않을까해서 매체연기반 수업 등록했다.
연습+촬영+회고가 중요한 흐름으로 파악 되었기 때문이다. (수업 안 듣는 때에도 책이든 칼럼이든 인터뷰든 읽음)
매체연기는 어떻게보면 정말 정적이기도 하다.
카메라 앵글 앞에서 벗어나면 안 되니까.
어떻게보면 자유로움이 조금 제한되는 느낌.
그런데 오히려 나의 실력이나 수준에서는 그런 제한이, 좀 더 독백 대사 몰입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 처음엔..)
훈련하면 할수록 확실히 근본은 메소드연기워크샵에서 나오는거 같단 생각.
인생 첫 선생님이 중요하다는데, 정말 감사할 따름이고
상상훈련이 이렇게 발휘되는구나, 수도 없이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6.
그러고선 난관봉착.
대사가.. 새롭지 않다!!
연습은 많이 하는데, 그리고 촬영한 영상을 돌이켜보면서 회고도 하는데!!
이게.. 영상 보고 회고를 하니
자꾸 나를 그 틀에 집어 넣는 굴레가 발생.
최종 영상 촬영하는 디데이에 오히려 처음 연습하던 때보다 몰입도 안 되고 감정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분명 캐릭터가 내뱉는 대사는 그 순간 처음일텐데 내게 너무 익숙해져버린 대사가 지루하기도 하고 쪼가 생겨..
카메라 연기할땐 똑같은 균질한 연기를 여러번 뒤집어 촬영해야한다길래 강박이 좀 생겨버리기도 했다.
균질한 연기라..
어떻게 하나..
훈련을 거듭해서 균질한 아웃풋이 나오도록 해야하는걸까 싶은데 현재로서는 어렵다.
감정에 몰입되는 순간을 불러오는 소재도 대사를 할때마다 달라져서 미리 정해둘 수가 없다.
나라는 인간.. 하루에도 수많은 감정이 수차례 복합적으로 발생하고 변동하는 나라는 인간..
나는 이 점을 알기에 내가 배우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배우를 꿈꾼다고 생각했지만
나조차도 나를 알 수가 없다. 너무 변화무쌍해..
결국.. 셋 미 프리...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똑같은 대사인데도 그때그때 새롭게 나를 맡겨야 한다.
나는 지금 이순간에도 변화하고 있기에 그 감정의 파도를 동일하게 생각해선 그 실마리를 재활용 하기엔 어려울 수 있다는 점..
또는 훈련이 부족해서 일지도.
진짜 연기 잘하는 사람들은 표정 하나 동작 하나까지도 계산한다던데.
아직 그 수수께끼를 풀기엔.. 여전히 훈련에 또 훈련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