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유신/반공 검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거미집>
**아래의 내용에 영화의 스포일러와 주관적인 해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김지운 감독의 신작 <거미집>. 예고편을 보면서 왠지 1970년대 영화촬영 분장실을 배경으로 배우들의 험담이나 감독과의 불화, 영화 제작을 둘러싼 여러 좌충우돌 요소가 코믹하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컸다. 영화 시작 약 5분 간 강렬한 흑백 화면의 인트로가 인상적이다. 희번뜩 매섭게 눈을 치켜뜬 배우 이민자(임수정)가 극 중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비 오는 날 저택으로 거칠게 창을 깨며 침입하는 광기에 가득 찬 모습. 영화 속의 영화 <거미집>에서 이를 촬영하는 감독 김열(송강호)과 스태프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카메라 무빙까지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때는 몰랐다.
이 영화가 주인공인 감독 김열의 주입식(?) 예술론 132분으로 가득 차 있을 줄은.
영화 <거미집(COBWEB)>
개봉일: 23/09/27
장르: (블랙) 코미디
감독: 김지운
주연: 송강호, 임수정, 전여빈, 장영남, 오정세, 정수정, 정우성(특별출연)
내용: 1970년대 유신/반공 검열로 자유로운 영화 창작이 어려웠던 시대에 감독 김열(송강호)은 이미 촬영이 끝난 영화 <거미집>의 결말을 바꾸면 걸작이 될 것 같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대본은 심의를 통과할 수 없고, 제작자 백회장(장영남) 몰래 조카 신미도(전여빈)를 설득해 비밀리에 촬영하기로 한다. 데뷔작의 성공 후, 줄곧 평론가들의 악평과 힐난에 잔뜩 예민해진 김 감독은 이번 영화만큼은 꼭 걸작을 만드리라 다짐하는데... 꼬인 스케줄과 역할 변화로 불만을 토로하는 배우들, 현장으로 들이닥친 정부측 검열 담당자 사이에서 해낼 수 있을까?
ㅡ 리더로서의 감독 김열
인터넷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장생활 논쟁 중에 '성격 착한데 일 못하는 사람 VS 성격 나쁜데 일 잘하는 사람'의 밸런스 게임이 있다. 성격도 착하고 일도 잘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애플의 故 스티브 잡스처럼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인 천재이자 독설가인 리더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왠지 뛰어난 대가들은 목표달성을 위해 모두 날이 서 있을 것 같은 선입견부터 생긴다.
흔히 예술가형 기질을 예민하다고 표현할 때가 있는데,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예민하기 때문에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세심한 부분까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이 발달했을 것이다. 이는 창의적인 아웃풋을 내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지만, 과도하면 사람들과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결과라도 좋으면 다행이다. 반대로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데 허세나 욕심만 지나친 빈 껍데기일 수도 있다. 정말 안타깝다.
김열은 행동하지 않는 리더다. 자신의 예술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정작 정부 관계자의 방문으로 촬영 현장이 어수선해질 때 김 감독은 세트장 너머로 도망가기 바쁘다. 자신보다 기가 세거나 권력을 가진 인물들 앞에선 한없이 작아진다. 오히려 조감독이 수정된 시나리오의 내용을 어떻게든 검열 기준에 어울리도록 설명할 논리를 만들고, 이리저리 통제를 벗어나는 배우들을 설득해서 카메라 앞으로 데려 오느라 바쁘다. 실무는 조감독이 마무리해도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가는 것은 리더인 김열의 몫인데,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는 리더 아래에서 조감독은 한 시라도 빨리 다른 촬영장으로 옮겨가고 싶었을 것이다.
ㅡ 왜 김열은 신 감독의 대본을 훔쳤을까?
김열(송강호)에게선 천재의 자신감보다 오히려 범재의 열등감이 느껴진다. 김열은 줄곧 자신의 스승이자 선배인 신 감독(정우성)과 비교될 때마다 신 감독의 영화 대본을 본인이 썼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영감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신 감독의 환영을 보고 그의 조언을 얻는다. 심지어 신 감독의 촬영장에 갑작스러운 화재로 모두가 정신없던 과거의 어느 날, 김열은 선배 감독의 대본을 훔쳐 나온다. 신 감독의 이름 석 자가 정 가운데 보이는 육필 대본을 슬그머니 감추는 그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제 물건을 찾아온 사람이 아닌 절도하러 온 도둑 같다.
김열이 시종일관 읊조리는 대사와 내레이션ㅡ'이틀만 더 찍으면 걸작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니들이 무슨 예술을 안다고! 작품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ㅡ 이 관객에게 극도의 피로감을 안겨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라리 대본을 김열이 대필했기 때문에 다시 가져왔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다거나 예술의 완성을 위해 직접 돌진하는 스타일이었다면, 김열의 반복되는 혼잣말이 괴팍한 장인의 근거 있는 고집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마치 김열의 허울뿐인 외침은 선배 감독의 후광과 그의 재능을 훔쳐 아무것도 없는 자신과 부족한 작품의 완성도를 과도하게 포장하려는 변명처럼 들린다.
ㅡ왜 이 시대여야 했을까?
1970년대 유신정권과 반공 검열이 시대적 배경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지만 스쳐가는 단면일 뿐이다. 몇몇 대사 외에는 어떤 장면이 어떤 측면에서 당시 검열의 대상이 되는지 관객의 눈높이에서 더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쉽다. 배우들의 말투와 배경에서 표현되는 것 외에 시대와 더 깊은 연관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주인공의 설정부터 정통 예술가로서의 당위성이 흔들린 와중에, 시대적 한계와 평단의 자질 부족으로 꿈을 펼치지 못할 위기에 처한 영화감독이라는 인물을 굳이 1970년대에 세울 연결고리가 약하게 느껴진다.
'내가 만든 뛰어난 작품을 제대로 알아봐 주는 이가 없어!'라는 고충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하지만 그 작품이 진실로 위대한 이유를 스스로 품고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누군가는 알아본다. 대중적이지 않더라도 마니아가 생길 수 있다. 물론 본인의 뚝심을 지켜야 할 순간과 타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방향을 전환해야 할 순간을 결정하는 일은 어렵다. 그렇기에 본인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장 첫 번째로 자신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거미집>을 완성한 이후, 감독 김열은 후속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로 우뚝 선 거장이 되었을까?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사이로 마냥 밝지만은 않았던 김열의 감정없는 표정 뒤로 어떤 미래가 펼쳐졌을지 궁금해진다.
ㅡ p.s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김구림(1936~) 작가의 개인전을 다녀왔다. 영화의 배경과 동시대에 작품활동을 왕성히 했고 국내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초라고 일컬을 정도로 실험적인 작품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었다. 특히 도슨트에서 같은 작품이 일본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극찬을 받았다가 국내에서 정작 출품조차 거부당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예술가의 뛰어난 천재성도 중요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기준과 열린 안목,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 등 총체적인 원인에 따라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 같다.
▶ 영화를 보며 인상 깊었던 부분들
- 크리스탈의 까탈스러운 신인 여배우 연기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 영화보다 영화에서 찍는 흑백 '거미집'이 더 재밌어 보이던데, 단편으로라도 나오면 좋겠다.
- 신 감독으로 특별출연하는 정우성의 나르시시즘에 빠진 연기가 깨알 웃음 포인트.
- '플랑 세캉스(plan-sequence/롱테이크)'
▶ 영화를 보며 아쉬웠던 부분들
- 크리스탈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극 중 서사가 없거나 쓰임새가 소모적이라 아쉽다. 좀 더 입체적인 인물들로 그려졌다면 극이 유기적으로 느껴졌을 텐데, 여러 배우들의 앙상블보다는 영화의 메시지 전달(송강호의 내레이션)에 집중한 느낌이다.
- 극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포인트가 내용의 흐름상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지점이 아니라, 배우 개인기에 단발성으로 웃게 되는 순간이 다수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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