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생을 살아보기로 했다

프롤로그

by 진이

왜 이렇게나 쥐고 사는지 모를 일이다. 타고난 맥시멀리스트는 계속 무언가를 수집하고 또 쟁여둔다. 이런 성향은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초등학교 때부터 빠짐없이 쓴 일기는 본가집 한 켠에, 그리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서울 자취방 책장도 가득 채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짐은 늘어만 간다.


문득 이 몸 하나 키우는데 이게 다 무슨 필요한 것들인가 싶었다. 허망하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는 왜 집착처럼 기록하고 언젠간 읽을 거라 자위하며 이제는 100권도 넘을 일기장을 보관하지? 그래 일기는 나이 먹어 적적할 때 내 생을 돌아보는 용도로 쓴다 치자. 그럼 쓰지 않는 물건 하나 버리지 못하는 건?


이전에도 이런 생각들은 여러 번 했으나 하다가 또 말았다. 그런데 이번엔 ‘버려야겠다’고 정말 결심했다. 아마도 쉽지 않았던 4월 때문일까. 밤새 놀다 노트북과 휴대폰뿐만 아니라 일기장이 든 백팩을 통째로 잃고 절망했던 이틀, 오랜 친구 혜인에게 찾아온 믿지 못할 상실, 몇 번을 엇갈리고는 결국 접게 된 말레이시아 취업까지. 아, 지난겨울 몽골에 가서 만난 애인도 잃었다. 처음엔 머리가 지끈했는데 하루 걸러 위에 나열한 사건들이 몰려오자 나는 생각하기를 멈췄던 것 같다. 그런 시기의 나는 도통 펜을 잡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냥 그렇게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채로, 다양한 층위의 잃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침대에 누워있는데 벽면 한가득 채운 휘황찬란한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몸은 하난데 옷은 수백 개고, 신발은 지네라고 해도 할 말이 없네.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책장 속 잡동사니는 어떻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온갖 중한 상실들을 겪고 나니 지연된 내 바람 속에 ‘언젠가’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에게 조금 유한 내가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때가 없었다면, 아닌 것. 보통은 아닐 것이다. 이러다가 언젠가 근사하게 먹겠다며 산 와인 디켄더 들고 관에 들어가 마실 판이니.


나는 잃는 법을 배우고, 생에 조금 더 의연해지기로 했다. 그래서 하루에 하나씩 무언가를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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