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한 스푼_#3] 하이퍼픽션과 주동-반동인물의 전복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이 흥미로운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이 서로 전복되면서 작품의 주제가 뒤틀리기 때문입니다. 앞서 창작의 주체는 알고리즘에 종속되지 않고 능동적이고 서사를 개척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이퍼픽션의 특성상 독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인 만큼 독자가 서사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빙의 장르는 작품 내 등장인물로 직접 참여하게 되어 서사에 개입되는 만큼 더 적극적으로 작품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이퍼픽션과 빙의 장르를 비교하면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독자/플레이어가 작품의 주동인물로 개입하게 된다면 적극적으로 서사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게임 장르에서 빙의되는 인물군은 엑스트라에서 악녀까지 다양합니다. 주동인물이 아니면서 비중도 적은 역할군에 빙의되었을 때도 주동인물을 제치고 서사를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비중 없는 엑스트라에 빙의된 독자/플레이어가 갑작스레 극 주제에 개입하려하는 서사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사의 개연성은 인과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서사의 개연성이 잘 잡혀있다면 극 인물들의 행동과 결과에 따라 바뀌는 서사를 독자가 거부감 없이 납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빙의 장르에서 극중 인물로 빙의된 독자/플레이어가 ‘능동적’이기만 한다고 서사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독자/플레이어가 작품의 주제가 구현되는 데 일조하는 ‘주동인물(protagonist)’ 혹은 ‘반동인물(antagonist)’의 역할을 쟁취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극 인물(character)은 극작품(소설/게임)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김재석5) 교수는 극인 물을 작품의 주제를 구현하는데 기여한 여부에 따라 넓은 의미의 극 인물과 좁은 의미의 극 인물을 제시합니다. 넓은 의미의 극 인물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가리키는데 엑스트라부터 주동인물까지 모두 포함하게 됩니다.6) 이 리뷰는 좁은 의미에서 극 인물에 주목합니다.
기존 극 인물들은 작품의 주제를 구현하는데 기여하는 소모품입니다. 이들의 행보는 서사 논리와 알고리즘을 따릅니다. 극 주제에 종속되어 지극히 수동적인 극 인물들과 달리 작품의 주제와 서사를 인지 혹은 이해하고 있는 독자/플레이어는 극 인물에 빙의되었더라도 서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에서 페넬로페에 빙의된 플레이어가 기존 서사를 거부함으로써 주동인물 너머의 기존 서사와도 대결구도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독자/플레이어가 서사를 거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소설/게임 속 서사에 빙의된 독자/플레이어가 작품의 주제와 세계관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서사의 흐름과 구조를 파악한 독자/플레이어는 종속되지 않고 서사를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빙의된 독자/플레이어가 기존 서사를 거부한다면 극 주제는 기존서사를 유지할 것인지 폐기할 것인지 두 갈래로 나뉘게 되고 빙의된 독자/플레이어는 기존 서사를 유지하려는 주동인물과 대결구도를 이루게 됩니다. 극 흐름은 뒤틀리게 됩니다.
그리고 극 흐름이 완전히 뒤틀리게 되어 주동-반동인물의 대결구도가 전복된다면 기존 서사와 함께 주동인물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폐기됩니다. 그리고 극/작품은 새로운 주제를 요구하게 됩니다. 새로운 주제는 재구성된 서사를 이끌어갈 핵심적 역할인 주동인물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역할이 전복됩니다.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의 악역 페넬로페 에카르트에 빙의된 플레이어 역시 기존 서사(노말모드)의 서사를 거부하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독자/플레이어가 작품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고 기존 서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 서사에 대항한다고 해서 그 즉시 기존 서사의 틀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기존 서사가 더 이상 버티다 못해 무너지게 되는 시발점은 바로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이 전복되었을 때입니다. 반동인물 이었던 페넬로페(독자/플레이어)가 주동인물이 되는 순간, 서사는 재구성되고 재구성된 서사는 전복된 주동인물인 페넬로페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주제를 구현하게 됩니다.
정리한다면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악역 페넬로페에 빙의된 플레이어는 기존 서사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게 되고 주동인물과 반동인물 대결구도가 무너지고 역할까지 전복됨으로써 극 주제는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된 새로운 주동인물의 논리에 따라 비틀리게 됩니다.
5) 경북대 교수. 주요 저서로는 〈일제강점기 사회극 연구〉, 〈한국 연극사와 민족극〉, 〈근대 전환기의 한국의 극〉이 있다.
6) 김재석, 『한국 현대극의 이론』, 6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