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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tlewomen Feb 04. 2016

잡지는 살아있다

그뿐인가. 잡지 독자도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

마음이 괴롭거나 어지러울 때 '활자'를 읽는 버릇이 있다. 남들이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면, 나는 며칠 배를 곯은 아이처럼 급히 활자를 주워 삼킨다. 시간이 차고 넘쳤던 학창시절엔 책의 문장들을 따라 적었다. 좋아하는 필기감의 펜을 쥐고 손목이 저릴 때까지 꾹꾹 눌러 적곤 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 날엔, 혹은 무언가 결심이 필요한 순간엔 글을 썼다. 여러 차례 고심하며 퇴고를 반복하다 보면, 어떤 날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멋들어진 글이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알아채지 못했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을 건져 올려 내 딴의 확고한 결심이 서곤 했다. 요즘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건 텀블러, 그 다음엔 <어라운드>나 <킨포크> 같은 매거진, 그래도 해결이 안될 땐 역시 책이다. 어떤 일이든 이 세 단계를 거치고 나면 다른 건 몰라도 마음은 후련해지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글을 쓰고 싶은 날이다.


나는 패션지에서 온라인 컨텐츠를 만든다.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고 싶어서 잡지사에 들어왔는데, 어쩌다 보니 온라인에 발을 들이게 됐다. 남들이 비전 있다고들 하니까, 머지않아 종이잡지 시대는 끝나고 온라인 매체들이 강성해질 거라고 하니까. 스물 여덟. 뒤늦은 사회 생활.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별 뾰족한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길어야 6개월로 예상했던 어시스턴트 에디터 생활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프린트 기반의 회사에서 온라인 컨텐츠를 만드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편집부로 돌아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물론 2015년을 기점으로 판도가 바뀔 거라는 어른들 말씀은 맞았다. 매체들은 본격적으로 경쟁을 시작했다. 총만 안 들었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하루에 수십 개씩 짧은 글과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몇 천만원의 광고비를 들여 소셜 미디어 팬 수를 늘렸다. 팔로워가 많은 셀러브리티와 인플루언서들을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을지 골몰했다. 그러다 잘 기획된 타 매체 컨텐츠를 발견하면 약이 바짝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공허했다. 우린 무엇을 위해 이 디지털 월드에서 이토록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는 걸까?


종이잡지만 만들던 시절, 첫 사수였던 디렉터 선배는 내게 말했다. 잡지는 매스 미디어가 아니라고. 그러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떠들어댈 필요는 없다고. 이대로 묻혀지기엔 아까운 보석같은 사람들과 영화, 책, 음악, 장소들을 찾으라고, 그게 우리의 몫이라고.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내 원고를 봐주던 다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잡지가 신문과 다른 건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는 것이라고. 그러니 혹여 미운 인터뷰이가 있더라도 그 사람의 장점을 반드시 찾아내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웠다. 그 시절엔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 기획하고, 글을 쓰고, 촬영을 한 적은 없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했고, 작은 능력 안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야근 강행군이 이어지고 마지막 날엔 밤을 꼴딱 새고 아침으로 설렁탕을 먹으러 나가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고, 행복했다.


그런데 온라인은 태생부터가 달랐다. 퀄리티보다는 당장의 속도가 중요했다. 고심할 시간 없이 쫓기듯 문장을 만들면, 업로드하자마자 '좋아요'와 '클릭수'로 평가를 받았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벤트를 붙이고, 광고비를 쓰고, 컨텐츠가 컨텐츠로서 제대로 뭘 해보기도 전에 브랜드에 유가로 팔려 나갔다. 나도 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뭔가 해보겠다고 이 악물고 달리다가 잠깐 멈추고 돌아보니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들어왔을 뿐이다.


며칠 전 '잡지 독자는 살아있다'는 트윗을 보았다. 그 트윗의 링크를 타고 찾아가게 된 블로그의 주인은 한 달에 20권 이상의 국내외 잡지를 구독하고 있다고 했다. 비용이 만만치는 않지만 매체들이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들이 역력한 글과 이미지를 보면서 경의를 표하고 싶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한 남성잡지의 기사를 언급하며 경제전문잡지 수준의 컨텐츠 질과 에디터의 인사이트, 그리고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을 지면에 허락한 편집장에 대한 응원의 글을 남겼다. 그 다음 날이던가. 대학 동창에게 카톡을 받았다. 혹시 모 편집장을 아느냐고. 그 사람이 쓴 책을 봤는데 글을 참 잘 쓰더라고, 매력 있는 사람 같다고.


그렇다. 여전히 잡지도, 잡지 독자도 살아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부디 이 온라인 전쟁이 폼나고 멋지게 승패를 가르기 바란다. 나 역시 이대로 묻히기엔 아까운 아름다운 존재들을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적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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