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뿌리 탐구
Ⅰ. 토의내용
『자유론』을 읽고 크게 다음의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진행해 보았다.
*각자의 의견이 다르거나 그 근거가 많이 다른 경우는 발화자를 명시했지만 의견이 동일한 경우, 의견이 수렴될 경우에는 따로 명시하지 않았다.
1. 자유의 조건과 밀 주장의 논리성
Q. 자유를 위해 자유를 제약하는 것엔 논리적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가.
현우: 밀이 말한 자유의 제약은 ‘미개한’ 대상에 해당되는 말이다. 밀은 이성적인 인간만이 자유를 누릴 조건을 가질 수 있다고 본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 모순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밀에게 미개화(未開化)된 동양인, 어린아이 등은 이성적인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Q. 자유의 조건이 정말 전제되어야 하냐. 밀의 대전제 자체를 문제 삼아 보자.
현우: 자유의 조건이 전제돼야 자유를 논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조건 자체가 완전히 전제될 수 있는 일인가.(가능성의 측면에서) 이성적인 인간만이 자유의 방향을 논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이성적인 인간의 기준은 뭘까. 이것과 연결 지어서 청소년 투표권도 얘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투표권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여기에서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이성적인 투표권자로 보는 기준은 19세 이상이다. 즉 ‘나이’를 기준으로 본 것이지. 그런데 이 나이라는 조건이 정말 합리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대안이 있을까?
원진: 사람의 인지 발달은 개별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 사람을 항상 테스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테스트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일련의 교육과정과 그 속에서 정신능력 발달 정도에 따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즉, 개개 시민들을 하나하나 판단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계몽주의 시대에 나이를 정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 과정’이다. 계몽 국가에서 국민들은 동질의 교육을 받고 그 교육을 통해 창출된 인간상은 ‘투표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개인들이 동질의 교육 과정을 밟고 일련의 테스트를 거치면 (한계는 있을지라도) 이성적 인간이 된다는 믿음이 이 전제에 깔려있는 것이다.
상일: 문제는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 자체의 문제.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정신적으로 고등한 인간이 창출될만한 시스템은 아니지.
원진: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사례는 밀의 주장에 대한 반증 사례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우리나라엔 계몽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가 수입된 것이잖아. 밀은 미개화된 민족은 자유가 제한될 필요가 있고 그 이유는 ‘자유의 방향성’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들에 의해 수입된 민주주의로 개화한 대한민국에서 자유의 방향성은? 밀의 논리적 전개과정은 오류가 없어 보이지만 그에 반하는 ‘실례’들이 존재한다.
Q. 합리적인 인간은 뭐냐.
철저한 계몽주의자인 칸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몽은 스스로 기인한 미성숙에서의 탈출. 즉 인식의 체
계화가 이루어진 인간이다. 개념의 위계를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인간. 밀에 따르면 이러한 합리적 인간들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일정 부분은 공리주의적인 발상이기도 하지.
Q. 악용될 수 있는 방향.
원진:밀이 주장하는 ‘자유’에서 우리는 그만의 엘리트주의를 엿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는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철인정치’의 개정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사람마다 방향성이 다른. 효용의 증감에 대한 기준. 이는 보통 다수에 의해 결정될 때가 많다.
현우:자유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실행되는 ‘자유’가 개인의 자유와 항상 일치할까? 자유의 방향성에 반하는 사람들은 통제의 대상이다? 결국 이성을 중심으로 나아가면 전체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2. 『자유론』 현실 적용
Q. 밀이 생각하기에 도박, 마약, 매춘은 어떨까?
현우:이들도 권장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반대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에만 해당하는 것. 완전한 개인이 존재하느냐의 문제. 인간(人間)의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은 항상 어떤 집단에 속하고 그 네트워크에 영향을 주지 않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위라는 게 있냐. 이게 구분 가능한 영역인지 확실하지 않다.
Q. SNS와 사회성?
현우:이게 소셜이라는 어휘를 달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Sociality, 밀이 말하는
사회성과 주커버그의 사회성은 좀 다른 개념이다. 현대에서의 사회성은 어떤 위치를 가지는지. 개별성을 중심으로 쓴 책인데. 지금은 기업에서 사람 채용할 때 트래픽을 수치화해서 그 사람의 사회성을 측정하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페이스북 상에서의 친구 수와 실제의 사회성이 일치할 수 있는가? 진정한 사회성은 연대인데, 다른 행위자와 연대할 수 있는 것인데, 현대 대중의 사회성은 굉장히 1차원적이다. 선호와 공감 사이?
상일: 진짜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문제는 그런 공감과 1차원적인 호불호가 같은 선상에서 수치화되고 연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엔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공감하고 하는 것에서의 사회성이었을 텐데. 그런 사회성과 많이 달라졌다.
원진: 한편 이걸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그저 향수 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그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일 수도 있지 않나. 그 변경 과정에 대한 설명이 중요한데, 그저 과거와 비교해서 안 좋아, 싫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현우: SNS가 개별성의 통로는 될 수 있는데, 더 넓은 사람들한테 더 많은 개별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런데 SNS가 진정 사회성을 발양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나.
원진: 사회성 함양의 플랫폼도 될 수 있지 않나. ‘안녕들’ 등. 사회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새 통로가 열린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밀이 의미하는 사회성에서의 통로도 되고.
상일: 마녀사냥 등의 문제도 있을 수 있지만. + 표현의 과격화 문제도. 인터넷에서의 특수성도 있고. 심사숙고해서 글을 쓰고 토론하는 장이 아닌, SNS. 즉답의 기능을 하는 이러한 통로에서. 키워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게, SNS라는 익명성+간접성의 투구를 쓰고 사람들의 말이 폭력적이 되고 과격화되고. SNS상의 사회성이 진짜 사회성인가. 단지 매체의 특성 때문에 더 센세이셔널해지고 이런 매체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이 진짜 사회성 증대에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든다.
결론적으로 FACE BOOK은 사회성과 개별성을 모두 함양할 수 있는 플랫폼이기는 하지만, 억압할 수 있는 기제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요즘엔 특히 더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3. 표현의 자유
선악의 문제로 치환되어버린 여론 구도. 이 속에서는 합리적인 토론이나 공론이 이뤄질 수 없지 않을까?
Q. 표현의 자유라고 하면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 이 범주는 어디인가.
원진: 명예라는 것. 허위사실을 명예라고 봤을 때. 한국사회에서의 논쟁은 19세기 정도이다. 정부라는 사회 억압 주체에 대해서 어떻게 자유를 지켜낼 것인가로 에너지 소모를 한다. 어떻게 건전한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언어폭력의 관점에서 봤을 때 표현의 자유라는 틀 안에서 해석하긴 힘들지 않나. 19세 기적인 표현의 자유 논쟁이랑 얽혀서 논의하다 보니까 논의가 뒤섞이는 경향이 많다. 정부에 반하는 비판을 하면 일베나 극단주의적인 애들이 그럼 ~~ 라는 말도 해도 되겠네라는 어그로를 끄는 것이 현실이다.
Q. 그럼 표현의 자유가 이뤄졌을 경우 기준?
‘밀’이 얘기하는 사회적 효용.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간다고 봤을 때에는 억제했을 때 얻는 효용과 풀어놨을 때 얻는 효용 중에서 풀어놓는 것이 낫다. 사회의 자정작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만약 자유를 지나치게 억제한다면 권위주의적으로 퇴보할 수 있다. 두 힘 사이에서 교호 작용으로 인한 해결방안을 찾는 편이 좀 더 낫지 않나 생각하다.
4. 민주주의와 개별성
Q. 개별성과 민주주의 문제. 민주주의가 완벽한가?
‘밀’이 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의민주주의제를 하자고 했다고. 밀이 걱정하는 것은 아마 중우정치였을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은 민의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민의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는 중의 정치일 뿐. 지금의 대의민주제는 전체주의로의 회귀를 불러올 뿐만이 아닌가.
Q. 생활세계의 민주주의 문제.
메인스트림이 형성되는 순간 그에 반하거나 그와 다른 길을 가려는 마이너들은 매장당하지.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의 흠결이 있는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라는 것은 소수의 압제를 다수의 압제로 분산시킨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도 자유에 반하는 ‘압제’는 엄존한다.
Q. 그렇다면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소수의 자유를 더 보장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투표법 개선뿐이지 않나? 각자 다른 선호도에 가중치를 주는 콩도르세 투표법, 밀의 1인 2 표제 등이 있을 수 있다.
Ⅱ. 발제문
1. 남상일
자유론은 지난 세기에 걸쳐서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저술한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고전의 지위를 획득했다. 단순히 많이 읽혔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책으로 인해 근대 자유주의 사상이 싹을 틔웠기 때문이다. 그만큼 걸출한 저작인 이 책 내용 중에서도 백미인 부분은 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관하여」이다.
그가 살던 19세기 초중반 유럽에서 아직 ‘사상의 자유’ 혹은 ‘토론의 자유’는 익숙지 않은 개념이었다.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혹은 글 한 줄 잘못 썼다가 목이 날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그는 과감히 어떤 사상이든 가질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주창했다. 그는 사상에 대한 압제자가 국가기관일 수도 있고 다수 대중(사회) 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그는 특히 ‘사회’에 대한 압제를 중점적으로 서술한다. 어떤 인간 개인 혹은 인간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무류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어찌 보면 소박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까지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다수 대중은 노력하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말도 덧붙인다. 만약 압제받는 어떠한 사상이 진리에 가까우면 인류는 그 압제로 인해 진리를 획득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만약 그 사상이 진리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류는 그와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 진리를 찾을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니 그 또한 큰 손해라고 주장한다.
사상 자체의 압제는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이다. 표현의 자유를 국가가 규제한다고 하면 이는 차라리 상대하기가 쉽다. 국가 기관을 뚜렷한 악의 표상으로 만들어 공격하기는 매우 수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수 대중에 의한 표현의 제약은 그렇지 않다. 다수는 그 자체로 선의 지위를 획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항상 오류를 갖고 있고 특히나 한국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만 보더라도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은 65퍼센트가량의 압도적 지지와 함께 ‘선’의 지위를 획득해버렸다. 그 과정에서의 논리적 정합성을 중요치 않았다. 그리 멀리 가지 않더라도 최근의 AOA 사건만 보더라도 대한민국은 마녀사냥에 매우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맥락에서 지민의 발언이 대단한 ‘표현’이라고 보기엔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사회의 압제’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녀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기실 그 상황이나 맥락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마녀’들은 정말 마녀사냥이 그러했던 것처럼 항상 만만한 약자가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압제를 다수의 압제로 변경해 놓은 압제의 방식 변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시스템은 다수결에 앞서 소수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게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다들 민주주의=다수결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사회라는 이름의 불특정 다수가 만들어내는 ‘여론’은 민주주의 사회라는 미명 하에 그 자체로 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 인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이로 인해서 압제받는 표현들의 주인은 항상 소수라는 것이다. 그들이 진리에 가까운 지 여부 역시 이 사회에선 중요치 않다. 밀 역시 민주주의 시스템의 다수결에 대한 불신을 내비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새로운 압제자가 ‘자유’를 더 확고하게 짓누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2. 이원진
『자유론』은 인간 자유의 한계를 고민하고 있다. 과연 어디까지 개별 인간이 자유를 가지며, 사회, 국가는 어디까지 자유를 간섭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밀은 이에 대하여 ‘타인에게 해를 주니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침해될 수 없다’는 간단한 원칙을 제시한다. 또한 자유를 목적이자 수단으로 주장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별성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자유지상주의자로 읽는 것은 오해이다. 책의 곳곳에서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임을 지적하며 공동체에 대한 의무 수행, 사회적 감정 등을 이야기한다. 결국 저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자유는 개인의 개별성과 공동체의 사회성 가운데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자유이다. 자유론을 읽으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1. 희망하는 것을 추구하는 자유를 위한 복지는 부당한 간섭인가? 저자는 서론에서 자유의 세 영역을 이야기한다. 내면적 의식의 자유, 희망할 것을 추구할 자유, 그리고 결사의 자유가 그것이다. 이 세 영역이 자유로울 때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가 되는 것이다. 개인들은 각자 자신에 대하여 최고의 적임자이기 때문에 각 영역 자유의 실현에 있소 개인들에게 간섭을 최소화해야 된다는 것이 밀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 경제적 조건 제공, 형성 즉 복지제도는 부당한 간섭일까? 복지제도는 필연적으로 밀이 인정하는 개인에 대한 조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개인 삶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을 수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맹자의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생긴다(有恒産 有恒心)”는 말처럼 사회 경제적인 조건이 부족한 경우의 자유도 상상하기 힘들다.
2. 개별성에 대한 부분도 논의해볼 만하다. 밀이 이야기하는 개별성을 상실하게 하는 조건들이 과연 획일성으로 이어지는지 고민해 볼 수 있다. 또한 현 민주주의 체제가 개별성에 끼치는 영향도 생각해볼 만하다. 개별성은 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나 삶의 방식이 완벽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과정에 있어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태도는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밀은 책 곳곳에서 개별성을 상실하게 하는 여론에 의한 다수의 횡포를 두려워한다, 개별성을 위협하는 기제로 대중교통의 발달, 상업의 발달, 교육, 정치적인 분위기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들과 여론이 개별성에 대한 적대적인 환경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육의 확대, 의사소통의 증대는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개별성을 늘리는 방향일 수도 있다. 교육과 의사소통의 확대는 전체적인 인민 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져 사회 전체에 개별성이 커질 수도 있다. 또한 최근의 새로운 기술인 SNS를 비롯한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도 개별성 향상에 영향이 있을 수 있다.
개별성을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전에 보았던 또 다른 학자인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로 이어지며 개별성을 크게 위축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은 책에서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여론에 의한 정치, 대중의 참여를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과연 민주주의는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자유의 확대인 민주주의가 곧 자유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3. 마지막으로 밀의 지극히 계몽주의적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수 있다. 자유를 위해 자유롭지 않은 방법을 쓰는 것은 타당한가? 이 모순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밀은 서두에서, 그리고 책의 곳곳에서 자유는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인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앞부분에서 소위 ‘미개 사회’에서는 인민들을 적절한 수준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독재도 필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라는 고귀한 목적을 위해 그 반이성적인 과정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과정을 중요시하는 밀의 주장에도 맞지 않는다. 만약 인민들이 무지몽매하다면 그들이 이성적으로 발전하는 그 과정 자체가 그 인민들이 인간으로서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이 모순이 오는 근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자유의 모순은 결국 밀의 사상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계몽주의의, 이성의 모순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이성의 제일(第一) 원리는 삶의 자기 유지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그 삶 자체를 제약하는 강압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자기 파괴가 되는 것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것도 같다. 삶을 풍성하게 하는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삶 일부분을 희생하게 되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유에 반하는 행위 인 것이다.
3. 성현우
1. 다수의 횡포에 따른 개별성의 위기
-‘자유론’의 문제의식은 ‘자유의 기본 원칙’에 압축되어 있음
-‘자유의 기본 원칙’이란, 남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
-자유의 영역+완전히 자유로운 사회의 조건
1)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
2)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
3) 모든 성인이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는 결사(結社)의 자유
-밀은 특히 개별성과 관련된 1), 2)를 강조
Why?
1)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일 수 있음
2)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의 일정 부분을 담고 있을지도 모름
3) 통설이 진리이고 전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둘러싼 토론과 비판은 여전히 필요함.
-이러한 주장의 배경
1) 대량 생산, 대중교통, 대중 교육, 대중문화 등의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징으로 인한 개별성의 위기
2) 개별성의 추구는 행복으로 귀결
2. 사회성과 개별성
-개별성의 보존과 더불어 인간이 사회 속에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를 함께 강조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전제
사회적 감정(이웃이나 동료와 느끼는 일체감, 협력하며 살아가는 존재, 공동의 이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 -> 사회성(사회와 개별 인간의 불가분성 : 인간의 본질적 측면, 공리주의 도덕률 : 당위적 측면)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뿌리 깊은 이기심, 사회적 감정의 약화, 개인 소외 등의 문제는 밀로 하여금 개별성과 사회성의 동시 발양을 강조하게끔 하는 배경이 됨
*SNS에 관해 얘기해 볼 수 있겠다
(Social Network Service지만 Social은 어디 있으며 Network는 어디 있는가? SNS를 통한 소통의 정도를 사회성의 척도로 보지는 않는다)
3. 자유의 방향
-자유의 절대적 중요성
1) 기능론적 차원 - 효용을 증대시키는 데 자유가 필요(공리주의)
2)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 - 결과와 상관없이 자유는 소중, 행복한 삶을 위한 근본 요소
*But 무원칙한 자유는 통제되어야 한다
-효용이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기준 -> 효용을 증대시키지 않는 자유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결과가 좋지 못하다 하더라도 본인의 선택을 더 귀하게 여겼던 <자유론>의 기조는? ->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위와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위를 구분, 순전히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자기의 삶에 절대적 주권을 누려야 함, but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통제의 대상
-자유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미개 사회인들 제외, 미성년자 제외, 독재까지도 정당한 통치 기술이 될 수 있음 => 자유의 조건이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 => ‘자기발전’이라는 목적론적 가치로 구성된 생명 원리에 부합하는 방향의 자유가 행해져야 함(자유의 합목적성), ‘자유의 방향성’을 이해하는 이성적 인간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얘기해보고 싶은 것 = ‘이성적 인간’의 기준, 청소년 투표권, 생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사이의 간극, 도박, 마약, 매춘 = 개인의 자유? 사회적 효용과의 상관성?
참고 도서: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옮김, 책세상 문고, 2016.03.10『자유론』『자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