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영화와 TV로 예술를 만나다

봄 이야기

by 아미달라



어슴푸레 밝아오는 아침을 느끼며 FM 클래식 라디오를 튼다. 이불 밖으로 나온 발가락을 까닥까닥,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며 마음을 충전시킨다. 라디오 들으며 시작하는 매일매일의 특별한 아침.


매년 이맘때, 봄기운이 느껴질 즈음이면 FM 클래식 라디오 방송에서 종종 들려오는 곡이 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초등 시절 막내 고모 방문에 붙어있던 <엘비라 마디간>의 영화 포스터 기억하게 된 곡이다. 좋아한다는 표현을 처음으로 해본 클래식 음악인데 한 장의 영화 포스터가 불러일으킨 아름답지만 까닭 모를 슬픔의 감정이 영화 삽입된 음악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다.


생각해 보면 내 감성의 물꼬를 튼 것은 영화였다. 극장에서 근무하던 이모부 덕분에 그 시절 입에 오르내리던 영화들을 공으로 볼 기회가 꽤 있었다. <E.T> <스타워즈> <그램린> <구니스> <인디아나 존스> 어린 시절 추억의 여러 부분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로 가득하다. 대형 스크린 앞 극장 1, 2 , 3 층을 가득 메운 관객과 영화관의 꿉꿉한 공기가 만나 일으키는 그 열기를 온몸으로 기억한다. 영화라는 황홀한 세계의 첫 기억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였다. 미지의 세계에서 온 존재와 지구 소년의 우정, 역동적이고 클래식한 자전거 장면, 밤하늘 달 속 둥실 떠오른 자전거를 탄 두 주인공의 실루엣, 관객들의 열광과 박수 소리… 지금도 잊히지 않는 짜릿하고 마음이 찌르르해지는 기억의 단상이다. 가끔 라디오에서 존 윌리엄스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연주가 들려올 때면 마음 가득 즐거움과 시큰한 감동이 차오르곤 한다. 영화 <죠스>의 메인 테마로 유명한 ‘존 윌리엄스’는 <E.T> <스타워즈> <슈퍼맨>의 작곡가이기도 한데 이 세 곡을 들을 때면 공통된 모티브가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세대에는 존 윌리엄스가 영화 <해리 포터>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 않을까?


영화관에서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브라운관 화면을 통해서도 영화와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열두세 살 비슷한 시기에 봤던 <로마의 휴일> <엘 시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들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짧은 커트에 흰 셔츠와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너무 예뻤던 오드리 헵번, 해바라기 같은 열정적 매력의 소피아 로렌,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히로인으로 직접 지목했다는 청초한 잉그리드 버그만 같은 여배우들에 대한 동경은 나를 영화의 원작 소설로 이끌었고 자연스레 문학작품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가게 했다. 특히 <애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에게 매료되었는데 욕망과 갈망이 가득 찬 미워할 수 없는 그녀의 눈빛과 <햄릿> <폭풍의 언덕>으로 유명한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와의 비극적 사랑의 서사는 비비안 리를 각인시킨 이유이기도 했다. 무대 뒤 불행했던 그녀의 삶은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의 ‘블랑시’에 그대로 녹아나 대체 불가능한 연기를 보였단 생각도 해본다.


중. 고생 시절에도 영화에 대한 애정은 계속되었다. <스크린> <로드 무비> 같은 영화 전문 잡지를 구독하며 <나쁜 피> <베티 블루, 37.2> <그랑 블루> 등 누벨 이마주로 대표되는 프랑스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에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하며 다양한 주제의 영화에 빠져들었던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내 관심을 끈 것은 영화음악이었는데 지금도 영화음악을 떠올리면 스토리는 가물가물해도 영화의 분위기나 당시의 감정이 선명히 기억되기도 한다.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이 꽤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 좋아하는 곡이 나올 때 시작 타이밍에 맞춰 정성스레 녹음한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듣고 클래식, 팝송,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과 만났다. 장르의 구분이나 특별한 취향 없이 단지 마음을 울리는 멜로디나 리듬에 매료되었던 음악들. 지금 그 시절 듣던 곡의 리스트들을 보면 내 감성은 이때 벌써 굳혀졌구나 하고 웃음이 난다. 영화 제목이나 곡의 제목을 다 기억 못 해도 귀 익은 멜로디가 스칠 때면 아련하고 뭉클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며 그 시절이, 마음의 잔상들이 떠올라 한참 멍하게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영화와 더불어 TV를 통해서로 음악은 항상 곁에 있었다. 어느 해 드라마에 삽입돼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그리그의 ‘페르 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음악으로 사용되어 강렬한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했던 헨델의 <사라방드> - 이 곡을 듣는 순간 끝 간 데 없이 달려가고픈 원초적인 충동을 느꼈더랬다-. 처절해서 숭고하기까지 했던 영화 <플래툰>의 짧은 광고 영상 속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에스콰이어 구두 광고에서 흘러나오던 너무 슬퍼 화면과 음악 외에는 세상이 정지된 기분마저 들게 했던 빌리 홀리데이의 <I’m a fool to want you> , 맥주 광고 배경음악으로 기억되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등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음악을 TV에서 만날 수 있었다. <What a Wonderful World>는 2021년 LG 올레드 TV 광고에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LG라는 기업 이미지를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생각나는 광고가 있다. <LG 브랜드 명화 시리즈>. ‘사랑해요 LG‘를 외치며 화면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명화들의 향연. 고흐, 마티스, 앙리 루소, 르누아르, 샤갈, 클림트….. 시선을 단번에 모으는 화면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꼬맹이 시절 엄마가 사준 미술 도감의 명화들을 떠올렸다. 도록 속 그림들과 마주했을 때의 그 호기심과 설렘의 감정이 화면에서 본 그림들과 겹쳐지며 마음에 새로운 파동을 일으켰고, 그 후 남아있던 마음은 책으로 옮겨가 책으로 그림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와 TV에 빠졌던 아이는 거기서 아름다움을 만나고 동경했다. 영화에서 음악으로 또 그림으로 글로 호기심과 감성을 충족시키고 또 여전히 감탄하고 설레며 특별한 보통의 날을 살아간다. 엄마가 된 아이는 그의 아이와 함께 사랑했던 아니 지금도 사랑에 빠진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추억의 명화를 공유하고 하나하나의 추억을 만들며 매일의 새로운 날을 만들어 간다. 이 모든 것을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하려 마음을 쓴다.


생각해 보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음악과 색채가 있었고 이미지와 글이 있었다. 순가순간은 그렇게 마음에 남아 나를 형성하고 완성해 간다. 손에 잡히지 않아 조바심치게 하던 이미지들의 나열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 가고 있는 이 시간들을 더 깊이 사랑해야 한다. 일상과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것들에 애틋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후 3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진행자의 목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오후의 정적과 나른함 속에서 정신은 더욱 선명해진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아! 봄이구나!”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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