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부는 바람

봄 이야기

by 아미달라

“보들레르에 따르면 플라뇌르는 망원경으로 사방을 관찰하면서도 이따금 바싹 다가가서 바라보는 초연 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존재이다… 도시의 군중을 광활한 사막처럼 여기며, 그 사막을 배회하는 자신의 고독을 만끽한다.


arte 출판사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이연식의 <드가>를 읽으며 기억에 남은 도시에 관찰자 ‘플라뇌르’에 관한 구절이다. 책은 파리라는 현대적인 도시를 바라보는 파리의 플라뇌르, 화가 드가의 시선에 관해 이야기한다. 도시를 표류하는 감각을 포착해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드가를 통해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 책을 읽으며 인식된 순간 즉, 현재를 보는 시선과 예술에 대한 알아차림 때문에 기억에 남은 책이다.


플라뇌르의 이미지는 내게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세상 속에 숨어있는”(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고독을 만끽하는 소요자. 그게 꼭 나같이 느껴져서일까? 물론 현실의 나는 보들레르의 글에 묘사된 이처럼 고귀한 정신이나 예리한 시선의 소유자는 아니다. 단지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아름답게 바라보려 하는 그래서 더 세밀히 보고 느끼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가끔 주체할 수 없는 열망에 휩싸이기도 하면서.


길을 걷다 봄비에 흔들리는 작고 하얀 들꽃을 보며 쇼팽의 녹턴 2번의 선율을 떠올리기도 하고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미루나무 아래에선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 그림들을 좋아한다. 불꽃처럼 하늘을 향해 휘몰아치며 뻗어가는 나무와 소용돌이치는 듯한 가지와 잎들에 시선이 고정된다. 불안하고 혼동된 열망을 느끼게 하는 나무를 보며 나를 떠올린다. 고흐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고흐의 소용돌이치던 그 마음을 함께 느껴서다. 나와 같은 마음.


어릴 적부터 예체능엔 젬병이었다. 피아노를 배워도 다른 아이들이 세 곡을 칠 때쯤 한 곡을 겨우 치고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를 만드는데도 소질이 없었고 몸으로 하는 것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잘하는 한 가지는 보고 기억하는 것이다. 누가 언제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 어떤 그림이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 그때 흐르는 음악은 무엇이었는지 사소한 것이라도 잘 보고 오래 기억하는 것. 사실 듣는 귀는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아들이나 남편이 한두 번 듣고 기억하는 멜로디를 난 몇 번을 들어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미지가 더해진다면… 가령 영화의 장면과 함께 기억하는 음악이나 스토리가 더해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곡이라면 누구보다 잘 기억할 수 있다.


박물관, 전시회, 음악회, 어느 곳이라도 텍스트가 있다면 자세히 읽고 열심히 살폈다. 나에게 예술은 먼저 읽고 익히는 것이었다. 오래전 클래식이 너무 궁금해진 날이었다. 몇몇 익숙한 곡들은 집중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클래식은 어려웠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아 부담스럽고 지루하기도 했다.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내고 도서관으로 가 클래식에 관한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다. 열심히 필기까지 하면서 음악가들의 이야기와 대표 작품을 익히고 클래식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듣든 안 듣든 클래식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처음엔 조금만 들어도 지겹던 음악이 시나브로 다가왔고 어느 순간 편해지기 시작했다.


미술도 마찬가지였다. 책으로 먼저 읽기 시작한 미술. 이중섭이 일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을 읽고 이중섭의 그림을 알아가고 고흐의 책을 읽으며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빛나는 밤과 해바라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어 다니기 시작하 공연과 전시도 역시 텍스트가 우선이었다. 텍스트를 읽고 작가의 의도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모든 것이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음악도 미술도 춤도 연극도 먼저 글을 보고 기억하고 기억을 되새기며 찾아가기. 예술은 나에게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공부였다. 내 호기심과 알고 싶은 욕구는 늘 밖으로 향해 있었다.


요즘 들어 예술을 대하는 마음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꽤 오랜 시간 참가한 ‘예술독서모임‘을 통해 다양한 예술을 접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표현하면서 책을 통해서가 아닌 내 안에서 느껴지는 예술이 궁금해졌다. 책을 통해 만난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과 감정들이, 나란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읽던 텍스트가 어느 순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보는 것이다. 작품이 내 마음에 어떻게 다가오나 음미하면서, 그렇게 밖으로 향하던 시선이 내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예술을 느낀다는 것은 현재의 나를 느낀다는 것과 같다. 한때는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작아지는 나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나는, 내 안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의 음률에 맞춰 발걸음을 옮겨야 함을 아는 사람이다. 파리를 누비는 플라뇌르의 발걸음처럼,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며 존재하는 나를 즐긴다.


공원에 앉았다. 바람이 불어온다. 높이 솟은 나무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서로 부딪혀 소리를 내고, 나뭇잎 사이로 산란하며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 공원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내 안에 불기 시작한 바람을 느끼는 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아. 름. 답. 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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