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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May 06. 2022

인사팀이죠? 저 퇴사하려고요.

요즘 이직 러쉬가 한창입니다.

1.

명동에 있는 회사로 면접을 보러 가는 버스 안에서 나의 손은 어수선했다. 신뢰감을 보여주려고 단정하게 만든 머리 매무새가 행여 추레해질까 오른손으로 양쪽 옆머리를 번갈아가며 눌렀다. 가끔씩 버스가 물리와 중력의 힘으로 나의 중심을 무너뜨릴 때면 슈트에 주름이 잡힐까 싶어 왼손으로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이런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 버스는 명동역에 도착했다. 버스에 내려 걸을 때마다 서울 도심의 낮 열기가 아스팔트 위로 느껴졌다.  

 회사 빌딩에 들어가기 전에 면접을 주선한 헤드헌터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을 알렸다. 곧 '02'로 뜨는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인사담당자였다. 인사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면접실에 앉았다. 약간의 긴장감을 누그릴 새도 없이 실무 면접관이 방에 들어왔다. 필요하지만 틀에 박힌 질문들이 오가면서 긴장된 분위기가 유지됐다. 계속해서 우리말과 영어가 오가며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다. 면접관들은 마지막 질문으로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원하시는 날짜에 맞추겠다'라는 대답을 하면서 내가 그들이 원하는 경력과 태도를 갖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삶이 언제고 원하는 대로 쉽게 흘러간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면접실로 들어온 그녀는 하얀색 투피스 세트의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다. 마른 체구의 그녀는 진흑발 숏컷 아래로 주름을 숨긴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녀가 나를 이미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인사 담당 임원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런 면접을 보러 오면 안돼요.
당신은 2년마다 이직을 자주 했어요.
이렇게 로열티가 낮은 사람은 우리가 쓸 수 없어요.
실무자들은 만족하던데 내가 안돼요.
다른 곳에 취업하면 오래 다니세요.
내가 말한 것 잘 새겨들으세요.
나중에 내가 한 말 고마워할 거예요."
 

집으로 가는 광역버스 안에서 머리 매무새와 양복 주름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버스 엔진의 장단에 맞춰 덜덜 거리는 차창에 머리를 대고 밖을 응시한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화가 나고 슬펐다. 2년마다 이직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와 슬픔이 밀려든 게 아니었다. 부당한 면접 대우에 말 한마디도 못하고 죄인인 양 엘리베이터를 타고 미끄러져 나온 내가 한심 해서였다.


10년 전 여름의 일이었다.


2.

작년부터 IT 산업에서 촉발된 개발자 쟁탈전이 다른 산업군과 직업군으로 확산되면서 요즘 기업의 화두는 인재 확보이다. 가히 전쟁 수준에 가깝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산업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융합이란 트렌드가 점점 가시화된 탓에 동일한 직군 내에서 여러 산업군의 경험을 한 인력은 이제 ‘T자형’ 인재로 대우받고 있다.  

특히, AI와 Digital Transformation 등의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IT 대기업 들은(카카오, 네이버 등) 개발자 확보를 위해 연봉을 10% 이상 인상했다. 금융업계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IT 솔루션 대기업들도 IFRS-17과 차세대 시스템 구축/유지보수의 안정적인 서비스를 위해 개발 및 유지보수 인력 채용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생산성을 끌어올릴 인력의 수요는 증가한 반면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과거의 적은 연봉으로는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나의 최근 경험에 따르면 회사와 거래하고 있는 유지보수 협력업체의 직원들이 단체로 이직을 하는 바람에 해당 서비스 공급이 중단되어 유지 중인 계약이 중도 해지가 되었고, 회사의 IT 장비 담당 팀장도 경쟁사로 이직을 했다.


이제 더 이상 잦은 이직을 한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보지 않는다. 이제 그러한 시대는 종말을 고한 것 같다.


3.  

수년 전, 긴장을 잔뜩 머금은 채 코리아 악센트를 날리며 영어 면접을 하던 나를 한국인 관리자들은 원하지 않았다. 다른 면접자들 보다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일랜드계 외국인 보스(현재 APAC-Singpore 담당 임원)는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의 채용을 결정했다. 그가 나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전자, 자동차, 섬유, 제약, 금융 등의 다양한 산업군에서 쌓은 경력과 경험이었다. 영어는 회사가 보완해줄 수 있는 부차적인 것이나 나의 경력과 경험은 회사가 확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입사를 한 후 채용 이유를 들었다. 나는 그가 지시하는 모든 프로젝트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출처: 한경 비즈니스 / 잡코리아

잡코리아의 최근 설문조사(중복 답변)에 따르면 전통적인 이직 사유인 '연봉 불만'과 '승진 상실'이 각각 43.7%, 12.6%를 차지했고, '일의 재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해서'가 23.4%, '강한 업무 강도와 워라밸 미보장'이 똑같이 21.2%로 나타났다.

연봉은 당연히 중요한 이직 사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로자는 (정신 또는 육체) 노동으로 구매력을 급여 형태로 보상받기 때문에 그렇다. 승진 또한 연봉 인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하지만 가끔씩 심한 변덕을 부리는 인간은 금전적 인센티브에 좌우되지 않기도 한다. 일의 재미와 보람을 느끼거나 삶과 업무의 균형에서 오는 혜택에 매료되면 높은 숫자로 점철된 연봉과 승진은 우선순위 뒤로 빠질 때도 있다.  

나의 아일리쉬 보스는 내게 업무 주도성과 삶과 업무 균형의 선택도 주었다. 그는 내가 어떤 업무를 어떻게 하고 언제 보고를 하던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만족스러운 결과와 성과를 보여주면 오후 3시에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아침에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그는 직원들의 업무 책임과 역할을 직책의 무게에 맞게 저울질하며 관리했다.


따라서, 업무의 독립성이 보장되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책임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일의 재미와 보람을 느끼면서도 나의 경력에 큰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한국을 떠나고 나는 정체되었다. 한국인 관리자의 마이크로 매니징 덕분에. 지금 이 글을 쓰는 점심시간에도 전화를 받았다. 뭐가 그렇게 미덥지 못해서 그렇게 못난 말들을 하는 걸까?


4.

기업의 대표 또는 임원 분들이 과거의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MZ 세대 친구들이 낮은 연봉을 받고 수직적인 조직문화에 시달리면서 회사의 높은 충성도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뒤처진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임원 승진을 성공의 척도로 보고 앞만 보고 달려온 나의 시대와 달리 요즘의 MZ세대들은 자신의 행복과 발전에 더 큰 무게를 둔다. 그렇다고 성공의 이름을 가벼이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생각이 다르고 서슴지 않게 행동을 옮길 뿐이다. 한 번의 실패는 영원한 추락을 의미하는 작금에 황금 같은 이직 기회는 물이 들어올 때 힘차게 저어야 한다는 비유에 딱 맞아떨어진다.


최근 퇴사를 했던 동료가 한 말이 기억이 난다.  


HR에 전화했는데 담당 직원이 이미 퇴사를 했다네요. 제 퇴사는 누구한테 말해야 하죠?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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