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겸 Aug 09. 2015

위안을 주는 주변적인 장소

대구 동신교를 건너 6층 건물의 병원을 지나다가 멈칫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튼다. 아랫 입술이 윗 입술을 올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몸마저 왼쪽으로 틀어 걷는다. 골목길 양 옆의 동네 상점들이 길의 소실점이 끝나는 곳까지 이어져 있다. 높고 낮은 어깨 담을 이으며 자리를 지키는 골목길 상점들이 나의 흥미를 잡아 챈다. 골목길이 주는 흥미에는 모험심이 있고, 예측 가능한 위험이 있다. 사람 키를 가볍게 넘긴 가정집 담장 벽 사이로 난 골목길을 걸을 때는 마치 미로를 걷는 기분이 난다. 골목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와 모퉁이를 지나면 어디로 연결되지 모르는 흥미진진함이 있다. 모험심으로 가득 찬 내가 골목길 미로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실제 미로에 출구는  하나뿐이겠지만, 골목길은 한 방향으로만 가면 빠져나올 출구가 여러 곳이다. 안전이 보장되는 위험은 모험심을 더욱 더 부추긴다. 반대로 큰 길은 이미 다녀본 길을 걷는 기분을 들게 한다. 그것이 처음 걸어보는 길이라고 해도. 시야가 안전하게 확보되고 많은 사람들이 걷는 큰 길에게 사실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어쨌든 모험의 끝에는 보물이 있기 마련이다. 가끔 보물 욕심에 큰 길을 버리고 골목의 좁은 길을 들어선다. 허탕을 치기도 하지만, 허탕이 있어야 발견의 기쁨이 더 크다.


"세계 어디든 모텔과 휴게소, 도로변 식당과 공항, 버스 정류장과 심야 슈퍼마켓이 있는 곳에는 호퍼적인 장소를 찾아볼 수 있다. 호퍼는 "주변적인" 장소들, 집과 사무실 너머에 있는 건물들, 특별한 종류의 소외된 시정을 느끼며 지나치게 되는 곳들을 제재로 삼는 미술 유파의 아버지이다"

- 슬픔이 주는 기쁨, 알랭 드 보통 -


첫 번째 소실점이 끝나는 곳에 작은 커피 가게가 있다. 와플과 커피를 파는 이 가게는 어떤 손님이든 환영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가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코팅한 유리창에 붙여놓은 메뉴판에는 '포장할인'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다.  커피 맛을 검증하는 손님 무리들도 확인할 수 없고, Takeout을 종용하는 듯한 뻔뻔함에 대한 호기심으로 문을 힘껏 열고 들어선다. 입구 정면에 카운터가 있고, 오른편에는 작은 테이블 몇 개가 겨우 자리를 잡은 작은 홀이 있다. 온 사방을 하얗게 덧칠한 천장과 벽 위로 백열등의 노오란 색이 반투명하게 덧씌우고 있다. 가라앉은 어둠에서 은은함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는 노오란 빛이 맘에 든다. 포장 할인을 받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머그잔으로 주문한다. 커피를 받고 홀짝 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가격에 합당한 커피 맛이다. 다시 커피를 홀짝 거리며 정면을 보니 우스꽝스러운 거울이 나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혹시 이곳이 예전에 미용실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손님들이 적고 붙인 크고 작은 포스트잇 군집들 덕분에 거울의 과장스러운 환대가  환기된다. 거울 옆에는 생명의 호흡이 없는 관목이 있다. 꼿꼿한 나뭇가지에 붙어 절대 시들지 않을 인조 나뭇잎들. 그래도 이 관목도 작은 홀의 침착성을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 한 몫 하고 있다. 다시 커피를 홀짝 거리며 책을 꺼내 들자 일하는 직원이 와서 내게 쿠키를 서비스로 내어준다. 쿠키를 반을 쪼개 입으로 털어 놓고 다시 커피를 마시며  마음속으로 선언한다. 이 가게는 이제 나의 '주변적인 장소'이다.



"호퍼의 작품은 잠시 지나치는 곳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준다."

- 슬픔이 주는 기쁨, 알랭 드 보통 -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대구의 신천동 어느 골목길에서, 동성로의 복잡한 화려움에서 멀리 떨어진 이 가게에서, 어둠과 조화롭게 대치하고 있는 노오란 빛의 은은함에서 나는 엄마의 자궁으로 돌아간 것 처럼 안정과 위안을 얻는다. 나름 만족스러운 발견이라고 자부하며 다 마신 커피잔을 카운터에 놓고 문을 열고 미끄러지듯이 빠져 나간다. 부디 이 가게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fin-


※ Cover Picture: Automat(1940), 에드워드 호퍼(더 많은 호퍼의 그림을 보고 싶다면)

※ 글과 사진에 상업적인 용도 사용 및 무단 편집 이후 게시를 하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인, 고통받는 도덕주의자를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