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지 않는 것, 삶의 찬사

삶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칭찬

by 라화랑

글자에게서 해방된 나날들.

일기를 쓰지 않는 건 삶에 보낸 최고의 찬사였다.

그저 느끼는 것. 흘려보내는 것. 담아놓지 않는 것.


맑은 마음이 오고 갔다. 깊고 새파란 하늘에는 뭉실뭉실 하얀 구름이 저만큼 해를 머금는구나. 버스 정류장 뒤에는 보라색 꽃들이 휘청이며 산발이었구나. 이어폰을 꽂지 않은 출, 퇴근길은 가을 소리로 가득하다. 아파트 경비원께서 싸리 빗자루로 은행잎들을 쓸어내는 소리가 내 최근 알람벨인 걸. 사악사악, 석석, 쓰윽쓱. 아프다고 일찍 나와 오후 3시에 맞이한 붉은 담벼락의 내 그림자, 걔는 몰래 춤을 추고 있더라고. 흔들흔들, 살랑살랑. 별 것 아닌 것에도 사진을 자꾸 찍는다. 꼭 안고 놔주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오늘을, 지금을.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한 요즈음. 언젠가 오늘을 그리워할 수도 있으니 또 다시 기록. 잠시만 고이지 않고 글자로 그저 붙들려 있어주기를 부탁한다. 손이 드디어 끄덕였으므로 나는 지금에서야 타자를 친다. 두 달 만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얕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는구나.'

깜짝 놀랐다. 퇴근 길에 노브랜드에서 신상을 집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걸어서 집에 가는데, 중간에 딱 노브랜드가 있다. 요즘처럼 쌀쌀한 날에는 참새의 방앗간마냥 중간에 들르기 딱이다. 몸도 녹이고, 저녁 반찬 고민도 하고. 나는 마트에 들어가고 나갈 때까지 두리번거리며 내 저녁 밥상에 올라갈 음식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분주했다. 그러다가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코너에 '냉동 꿔바로우'가 깜찍하게 누워있는 걸 보았지. 무척 기뻤다. 흥얼거리며 찬 덩이를 들고, 유제품 코너로 눈을 돌렸다. 요거트를 뭘 사야 하나 고민하자니 갑자기 지난 1월의 내가 떠올랐다. 눈물을 뚝뚝 떨구며 사연 있는 눈동자로 바라만 보던 여자. 지금 내 모습과 정 반대. 나는 정말 놀랐다. 더 이상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최대한 말해보자면 이렇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이만큼의 고민만 달고 살아가는 줄 몰랐다.

오늘 뭘 먹을까, 요거트 종류는 뭐가 좋을까. 같은 무게.

할랑할랑 너무 가벼워서 깜빡 날아가도 괜찮다고 웃을 것 같은, 딱 그 만큼.

우울증 약을 끊은지 어언 1년, 나는 인생 처음으로 산뜻한 뇌에 절여져 있다.

얕은 물가에서 참방거리며 인생을 노닐고 있다는 걸 나는 그 날 처음 깨달았다. 슴슴한 재미. 내가 이미 그 지경에 다다랐다니!


건강한 기분좋음의 신호는 또 있다. 추석 연휴에 짬이 나 남자친구와 여행을 했다. 3박 4일로. 가는 김에 예비 시부모님도 뵙고, 덕분에 맛있는 밥도 먹었다. 2박째였나, 우리는 전라도 저 멀리 여행을 갔고 꽤 긴 시간 자동차에 앉아 앞만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생 때부터 타 손때 묻은 그의 오래된 자동차 유리에 붉은 노을이 잠시 앉았다. 하루가 또 저물고 있구나,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멀거니 노을의 처음을 쫓아 위로, 더 위로, 저 구름 안을 기어코 보겠다고 집중해 쫓는다. 말을 하다 멈춘 나를 그는 채근하지 않는다. 무슨 생각에 빠져 있구나- 그저 짐작하며 운전을 할 뿐이다. 차 안에는 올드 팝송이 작게 울려 퍼지고, 다시금 입을 뗀 내 목소리는 한껏 갈라진다. 울컥.


"있잖아. 나 지금 뭘 느꼈냐면,"

"응. 뭘 느꼈어?"

"으응,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평화롭잖아 후웅!

그래서, 눈물이, 쪼금, 나왔어."

"으응, 그랬어? 평화로웠어?"

"응. 너무 좋아. 너무 고마워.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네가 기쁘다니 나도 좋아. 이런 걸 위해 내가 너와 여행을 하는 거야."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순간이 있는가 하면, 오래 붙들고 싶어 노력할 순간도 있다. 그 때는 후자였다. 나는 이 마음을 오래오래 잊지 않으려 냅다 하늘 사진을 찍었다. 가만히 있다가 울어버리는 여자를 인터넷에서는 당장 걸러야 할 별로인 여자라고 하더라고.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은 곁에 두면 인생이 망한다나 뭐라나. 나는 감정 기복이 무척 심하고, 그걸 알면서도 있는 그대로 다 사랑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 이 사람과의 내일도 꼭 이럴 것만 같았다. 집도 없어, 같이 살 수 있을지도 미지수야,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완벽한 건 없지만, 모자란 것 투성이지만- 이 다가온 햇살 하나가 무척이나 따뜻해 웃을 줄 아는 하루를 매일 보낼 것만 같다고. 나는 그런 내일을 정말 꿈꿔왔다고. 그게 오늘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목표가 없으면 나는 곧 고꾸라질 줄 알았다. 어두운 골방에 들어박혀 삶의 의미를 잃을 것만 같았다. 내가 나를 오해했다. 나는 목표가 없으니 잔잔해졌다. 책 출판과 글쓰기 마감에 9월까지 퇴근하고 무조건 노트북 앞에 앉아있을 때에는 그게 삶의 진정한 도파민인 줄 알았다. 심심하고 슴슴한 시월과 십일월의 나는 신기하게도, 그토록 내가 되고 싶었던 어떤 내가 되어 있었다. 눈을 휘리릭 말고 자박자박 뜰 줄 아는 여자. 천천히 속눈썹을 들어올리며 쌕쌕 숨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여자.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 여자. 내가 생각한 청순가련은 딱 그 뜻이었고, 하얀 치마같은 걸 입지 않아도 나는 드디어 포카리스웨트 CF 속의 한 장면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4년 전인가, 다이어리로 글을 쓰던 시절에 그려 놓은 그림 하나가 있다. 언덕에 곧 떠나갈 열기구를 붙들고 울고 있는 캐릭터였다. 허공으로 한 발 내딛는 발끝이 위태로워 흔들거리면서도, 누군가 등을 떠밀고 떠나야만 하는 사람. 무언가 만족하지 못한 현실에 나는 자꾸만 다른 것들을 뒤적거리며 삶을 바꾸려 했고, 그러면서 불안하기만 했다. 불안이라는 게 사람을 참 미치게 한다. 발 밑에 디딘 땅조차 원망하게 된단 말이다. 왜 하필 이 땅이냐고, 지금 이 땅을 왜 내가 밟아야 하냐고.


언젠가부터 울고 있는 내 옆에 네 발바닥 밑에 핀 꽃 한송이가 참 예쁘다고 가리키는 남자가 생겼다. 내가 직접 그 꽃을 어루만지고 자세히 볼 때까지 가만히 그저 기다려주던 사람. 이윽고 작은 보라 꽃 구경을 다 하자 내게 이렇게 꼭 말하는 것 같더라고.

"저기 봐. 저 언덕 너머에 이 보라 꽃 동산이 있어. 같이 가볼래?"

그 손에 이끌려 어제를 걸어왔다. 지나지 않을 것 같던 불행의 언덕에 내 발자국과 그의 발자국을 함께 찍었다. 그렇게 발자국 네 개가 도란도란 엮여 또 다른 하루를 걸어왔다. 땅을 보며 보라꽃동산에 언제 오나 두리번거렸더니 글쎄, 사실은 내 눈 닿는 모든 사방팔방이 꽃동산이었더라고. 그이와 함께 돌아가는 내 집이 바로 사실은, 내가 그토록 타고 싶었던 열기구였구나. 내 집 위에는 풍선이 알록달록 많이도 달려있었구나. 내가 출발- 만 외치기를 내 집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구나, 깨닫는다. 나는 그리하여 외친다.

"오늘 주식 다 빼! 일단 관망해, 관망. 여기서 손절."

갑자기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내일로의 출발을 외치는 신호다. 내가 이 하루에 얼마나 진심으로 스며들고 있는지, 알려주는 대사라고.


동화를 써야겠다, 마음이 따뜻해져서 히터가 따로 필요없는 몽글몽글한 글자들을 엮어보고 싶다.

그런 마음가짐이 가득한 초겨울이 다가온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고, 나만의 오늘을 걸어가야지 하고 다짐한다. 누구처럼. 그 맑은 눈을 닮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