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숨어있는 '리처드 파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활용한 시네마 테라피

by 글밥 김선영

인문상담 공부를 하면서 영화를 상담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두루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2013년에 개봉했던 《라이프 오브 파이》다. 지금은 뮤지컬이 상연 중인데 거칠고도 환상적인 바다를 무대에서 어떻게 재현해 냈을지 사뭇 궁금하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지시적·연상적·정화적 영화치료가 모두 강하게 작용하는 작품이다. 익숙한 세계를 모두 잃게 된 파이가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장면은 용기와 인내라는 지시적 효과를 누리게 해 주며, 영화 속 은유적인 장면은 내담자의 실제 경험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또 그 과정에서 억눌리거나 정리되지 않았던 감정을 정화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삶의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예상하지 못한 폭풍 속에 내던져진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비유이지, 진짜로 망망대해에 홀로 표류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 테다. 그런데 파이는 그것을 실제로 겪었다. 타고 있던 배가 폭풍을 만나 침몰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통조림 몇 개와 나를 언제 죽일지 모르는 존재-호랑이-뿐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피투, 나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저 던져진 존재로서 말이다. 파이는 익숙한 세계를 한순간에 모두 잃고 말았다. 심지어 작별 인사조차 남기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 전에 ‘나는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앞서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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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 조류에 떠밀려 멕시코 연안에 도착한 파이. 생존의 기쁨도 잠시, 200일 넘게 동고동락(?)을 함께한 리처드 파커와 헤어지게 된다.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배경음악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고 그 뒷모습은 냉정하리만큼 담담하다. 그의 가족처럼, 작별 인사조차 허락지 않는 헤어짐이었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의 본질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 혹은 자신을 잃는 것”이다. 삶의 중요한 존재들이 예고 없이 사라질 때, 우리가 경험하는 상실감은 단지 관계의 상실이 아니라 자기 일부의 상실이다. 타자는 결국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늘 근원적으로 혼자다. 얄롬이 말했던가.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나 역시 어떤 인연들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끊어졌다. 처음에는 그 이별을 설명 가능한 이야기나 논리적인 사유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 설명이 없는 상실도, 그저 그 자리에서 내가 의미를 선택해야 하는 삶의 일부라는 것을. 상실을 경험한 내담자 역시 이러한 삶의 이치를 이해하는 데 이 영화가 지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상담적 예시) 사고로 가까운 사람을 잃은 내담자

상담자: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가장 크게 흔들린 장면이 있었나요?
내담자: 리처드 파커가 그냥 숲 속으로 가버리는 장면. 그게 너무 남았어요.
상담자: 갑작스러운 이별에 인사조차 못 했다고 파이가 슬퍼했죠.
내담자: 네... 그 사람도 그랬거든요. 아웅다웅 싸울 때면 진저리가 났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보내게 될지 몰랐어요.
상담자: 파이가 “작별할 시간도 주지 않는 신”이라 말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내담자: 마치 제 얘기 같았어요. 왜 이렇게 잔인하게 데려가야 했나, 그런 생각이요.
상담자: 리처드 파커는 사라졌지만, 파이는 그 존재 덕분에 살아남았죠. 당신 삶에도 떠났지만 여전히 힘이 되는 존재가 있을까요?
내담자: 그 사람 생각이 제 삶을 버티게 한 것 같기도 해요.
상담자: 영화처럼요. 떠난 존재가 남긴 힘과 의미를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내담자: 슬픔만이 아니라 고마움도 함께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상담자는 파이가 겪은 상실을 ‘안전한 비유적 매개물’로 사용해, 내담자가 자신의 상실 경험을 곧바로 다루기 어려운 감정적 과부하 상태를 고려하면서도 지시적으로 주제에 접근하도록 돕는다. 내담자는 직접 말하기 버거운 무의식적 슬픔을 영화 속 이미지와 등장인물에게 투사하며 자신을 보호한다. 내담자는 점차 벼랑 끝의 정서에서 ‘감당 가능한 이야기’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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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방송 글을 쓰다가 지금은 책을 쓰고 있습니다. 청소년과 성인 대상 글쓰기/문해력 강의도 합니다. 늦깎이 대학원생으로 인문 상담 공부를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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