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반납에도 공부가 필요해

앞으로 선배들에게 잘 배워 보겠다

by 글방구리

영어, 한자, 바이올린, 풍금과 단소, 글쓰기와 책 읽기, 텃밭 가꾸기.

나는 요즘 바쁜 초등학생처럼 살고 있다. 처음 배우는 것도 있고, 뇌를 더 오래 말랑거리게 하고 싶어 다시 꺼내든 것도 있으나 실력과 수준은 대체로 초등학생과 비슷하다. 초등학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것과 바이올린 외에는 전부 독학이라는 것.


직장생활을 할 때는 내 입에 밥 들어갈 시간도 없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일터에서는 밥 안 먹는 아이들 먹여주느라 그랬고, 집에서는 식구들 밥 먹는 사이에 틈틈이 집안일을 하느라 그랬다. 밥 먹을 시간이 없으니 다른 건 말해 뭐 해. 잠 시간은 늘 부족하고 씻는 건 가능한 신속하게. 그렇게 아끼고 아낀 시간을 대체로 직장 일을 하는 데 썼다. 쓰고 그리고 만들고 오리고 붙이고 꿰매면서.


퇴직을 하고 난 뒤 한동안 내게 주어진 많은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우울해했던 때도 있었다.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일이 챙겨줘야 했던 아이들은 장성해서 자기 앞가림을 스스로 할 줄 알게 됐다. 내가 쓸모없어진 게 아니라 직장도, 아이들도 더는 내 손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뿐이다. 내 입에 밥 들어갈 시간이 충분해진 것은 그간 촌음을 아끼며 살아왔다고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왜 이리 허전하지?'

나를 위해 쓸 시간은 충분한데,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들곤 했다. 밥 먹을 시간이 충분하다고 해도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낭비해도 될 만큼 남은 날들이 많지 않다는 건 굳이 손가락으로 내 나이 갯수를 헤아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큼인지 몰라도 남은 삶 동안 그간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공부와 취미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는데도, 그것들이 내적인 기쁨까지 확보해 주지는 않았다.


내가 해야 할 공부, 내게 꼭 필요한 공부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공부를 도와줄 사람은 누굴까. 오래오래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성주간 동안 교종의 공식 자서전이라는 [희망](가톨릭 출판사)을 읽었다. 회칙이 아니라 자서전인 만큼 교종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삶에 대해서도 씌어 있었는데, 교종이 두 다리로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야 했을 때 느꼈던 고뇌가 인상 깊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교종의 태도가 담담하다고 생각했다.


대대로 병고를 앓는 교종의 모습은 언론에 자주 비치지 않았더랬다. 교종이 병고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교종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격화되곤 했다. 하지만 '빠빠 프란치스코'는 달랐다. 폐렴도 앓고 구토도 하고 열이 오르락내리락한다고도 했다. 교종의 병환에 대한 숨김 없는 정보 공유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기도는 훨씬 더 간절해졌다. 곧 임종을 하실 것 같던 교종이 예상과 달리 성주간과 부활절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휠체어에 탄 교종은 한눈에 보기에도 많이 아파 보였으나 그래도 얼마간 더 사실 줄 알았다.


그래서 부활절 다음날 아침에 들려온 그분의 선종 소식은 엄청 슬펐고, 반면 비슷한 크기로 기뻤다. 영적인 스승을 잃어 슬펐고, 그 스승이 더 큰 힘으로 세상을 위해 기도하실 거라서 기뻤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그분의 선종 후 9일 기도를 하면서 그분을 애도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분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그분이 이미 하느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실 것이므로.


최근엔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꽤 걸어야 하는데, 걷는 속도가 많이 늦어졌다. 대화를 하다 보면 말하고 싶은 단어가 얼른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다. 손발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새벽에는 성경 필사를 하지만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 눈이 가물가물하다. 예민함을 잃은 미각 탓에 음식 간은 점점 더 짜진다. 이렇게 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뿐 아니라,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장기들, 근육들, 세포들 모두 노쇠하다가 마침내 그 기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기능을 잃어간다고 해도 당황하지 말자고 늘 다짐해 왔다. 본디 내 것이 아니었고, 한평생 잘 빌려 쓴 거라고, 그러므로 상실이 아닌 반납이라고 생각하자고 거듭거듭 되새긴다. 욥의 고백은 뼈에 새겨둬야 할 화두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잘 반납해야 하는 건 육신이나 육신의 기능만이 아니다. 직장, 인간관계, 돈, 기억까지 유형 무형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 차례차례 하나씩 정갈하게 잘 쓰다가 돌려드려야 하는 때가 오면 말끔히 돌려드려야 한다. 중간 순서는 모르지만 가장 마지막에 반납해야 하는 건 내 코와 입으로 들락거리는 숨일 테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꼭 필요한 공부는 잘 반납하는 공부다. 나는 그걸 반납일을 예감하며 현장에서 담박하게 살아내고 있는 호스피스 선배들에게 직접 배워 보기로 했다.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준비하기 위한 일반인 교육을 신청했다. 그간 영 날짜가 안 맞았는데 드디어 글쓰기 수업과 겹치지 않는 일정이 공지된 것이다. 늦지 않게 도착해 맨 앞자리에 앉았다. 수강생은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서른 살 안팎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요법치료사, 수도자, 성직자 등 호스피스팀 관계자들의 강의가 하루 일곱 시간씩 이틀간 진행되었다. 말기환자, 암성통증, 사별가족, 연명의료결정 등 어느 하나 듣기 좋고 가벼운 주제는 없었다.


평소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묻는다. 나는 수첩에 동전의 양면이라고 적는다. 브런치 작가라면서 표현력과 상상력이 식상하기 짝이 없구나. 그러나 동전의 안팎을 가를 수 없듯 삶과 죽음도 별개의 것이 아니고, 양면이 조화롭게 보전되어야 동전으로서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니 적당한 비유를 생각해 냈다고 위로한다. 내게 주신 한 달란트, 내게 주신 하나의 동전. '나는 얼마짜리 동전일까?잘나 봤자 오백 원이요, 못나봤자 일 원이네.' 그러고 보니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 도긴개긴이다. 손상될까 봐 묻어두지도 말고 잃어버릴까 불안해하지도 말고, 본디 동전에 담긴 가치를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삶이 뱀밥이라면 죽음은 쇠뜨기. 겉에 보이는 형태는 달라도 원래 한 몸이었다. 나중에 찾다 보니, 삶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건 천지에 널렸구나.


이틀이 지나고 마지막 시간에는 미술치료 강사가 마무리를 했다. 호스피스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내 현재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아홉 개의 빈칸에 내 삶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그려 본다. 귀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로도 아홉 칸이 부족하다.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닌데도 들여다보고 있으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12년 동안 보수를 한푼도 받지 않았던 바티칸의 대통령은 지갑에 100유로만 남겼다고 한다. 그가 지냈던 단출한 방도 공개됐다. 교종이라는 직함조차 적지 않은 무덤에는 이름 한 줄만 남았다. 빠빠는 참으로 소박하고 정결한 수도자였구나. 겸손하고 성숙한 사제였구나.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이었구나. 노숙인이 바쳤다는 한 송이 하얀 장미에 나의 조문을 살포시 얹는다.


그러나 현실은...

대선을 한 달 여 앞두고 지저분한 뉴스로 도배 중이다. 누가누가 훌륭한가,가 아니라 누가누가 덜 나쁜가,를 따져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나쁜 놈이 하도 많아서 얼추 나쁜 놈은 봐줘야 한다는 말도 속상하다. 선종 후 당연히 직천당(直天堂)했을 교종처럼 존경스러운 사람은 바라지도 않는다. 내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만큼만이라도 정상적이고 사심 없는 사람이 이 나라를 위해 일하면 좋겠다.

그래서 누굴 찍을 거냐고?

만약 대통령직을 하는 동안 월급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후보가 나온다면, 그가 빨간 당이든 파란 당이든 나는 주저없이 그를 찍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천국에 또 지인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