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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는 향기로 온다

내 마음에 오래 간직하려면 틀려도 된다

by 글방구리

어릴 때 소풍 가면 반 대항 게임을 했어. 그중 빠지지 않았던 게 '씨엠송 부르기'였지. 한 반이 먼저 "미원 미원 미원~"을 부르면 다른 반이 "아빠 오실 때 줄줄이~"를 불렀어.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도 그중 하나였는데, 빡빡머리 오빠들은 그걸 "열두 시에 풀러요 브라자끈"으로 바꿔 부르고는 자기들끼리 킥킥대곤 했어. 부라보콘 노래는 김 모 여사의 주가조작 실태가 드러났을 때 "열두 시에 때려요 삼천삼백, 둘이서 때려요~ 도이치 모녀스~"라고 개사되면서 불후의 명곡이 되었지.

다른 반에 질세라 흥겹고 빠른 씨엠송을 부르다 어느 순간 분위기 다른 노래를 하기도 해. 이는 마치 디스코장에서 몸을 신나게 흔들다가 갑자기 블루스 곡이 흘러나오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아가씨 그윽한 그 향기는 뭔가요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카시아 껌!"

껌에서만 나는 향기인 줄 알았던 그 아까시 향기가 어디에선가 풍겨와 코끝에 머무는 때, 그때가 바로 입하야. 껌을 살 때가 아니고.


'아카시아'라고 알고 있던 그 나무 이름이 '아까시나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짜장면이 자장면이 되었다가 다시 짜장면이 되었고, 먹거리는 틀리고 먹을거리만 맞는다고 했다가 먹거리도 괜찮다는 오락가락 맞춤법에 나도 같이 오락가락하던 때. 아카시아를 아까시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어. 격음과 경음의 그 오묘하고 애매한 뉘앙스의 차이 때문이었지.


법과 규칙에 순종적인 나는 국립국어원이 틀렸다면 틀린 거야,라는 신앙에 가까운 신뢰감으로 그때부터 아카시아를 버리고 아까시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뭐, 아까시라도 큰 문제는 없었어. 아까시 잎을 따서 가위바위보로 잎사위 따기 놀이를 할 때도, 남은 줄기로 아이들 머리에 파마를 해줄 때도, 막 핀 꽃으로 떡을 쪄줄 때도, 아카시아든 아까시든 괜찮았어.


그런데 마지막까지 내 마음의 문턱을 넘어가지 못한 건 바로 향기야. 처음 모내기를 해봤던 날, 아마도 먼 산으로부터 들려왔을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잠시 청했던 낮잠, 온몸의 고단함이 머릿속의 번뇌를 씻어 주어 행복했던 그 여름날. 그날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던 논 흙의 깊고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코끝에 머물렀던 그 향기는 '아까시'가 아닌 '아카시아'였거든.


틀린 줄 알지만,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들.

나한테만 소중하고 특별할 뿐 다른 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지키느라 애쓰는 시간이나 정성은 매우 무용한 것일 수도 있지. 지킨다는 말보다는 간직한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런 것들. 예컨대, 내게는 입하 절기의 아카시아 향기 같은 것들.


문득 궁금해지네. 모두에게 소중하고 특별한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할까? 하찮디 하찮은 내 삶에서도 소중하거나 간직할 만하지 못하다면 그게 과연 이 인류에게 필요한 것일까? '틀렸다'라고 한들, 내 마음에 오래 간직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아니, 그게 정말 틀린 걸까?

아까시 나무처럼 요맘때 흰 꽃을 피우는 산딸나무, 때죽나무, 이팝나무. 아까시 나무의 다정한 친구들.
감이 달려 여름 동안 잘 익어 달려야만 감의 역할을 다한 게 아니지. 일찍 진 열매를 누가 틀렸다고 할까. 일찍 떨어져도 이리 귀여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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