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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구석이 필요해

적게 채워도 괜찮은 소만(小滿)

by 글방구리

주말농장 맨 앞쪽에서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 별명은 '농사박사'래. 할아버지는 한 평, 아니 한 뼘의 땅을 놀리는 것도 용납되지 않나 봐. 넓지 않은 밭에 감자, 고추, 배추, 옥수수, 상추, 당근, 대파 등등 대충 눈으로 세어 봐도 스무 종은 될 법한 작물들을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빽빽하게 심어 키우셔.


소만 절기에 나도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오기 전 장화 신고 호미 들고 밭을 돌아보곤 했어. 농장에서 내 밭을 가려면 할아버지 밭을 지나지 않을 수 없는데, 할아버지 밭에서 자란 작물을 보다가 내 밭작물들을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어. 모종을 심기 전에 충분한 거름을 주지 않았고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느지막이 시작한 두 고랑의 텃밭에서 무슨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겠어. 놀맨쉬맨 흙장난이나 하겠다고 시작한 텃밭인 걸.


그에 비해 할아버지 밭에서 자라는 작물들은 마치 국군의 날 광화문에서 행진하는 군인들 같아. 제각기 다른 크기, 제각기 다른 모양의 작물들이 어쩌면 그리 줄을 딱딱 맞추고, 반듯한지! 잡초는커녕 손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서로 어깨를 붙이고 있어.

농사박사 할아버지의 텃밭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다들 어쩌면 이렇게 잘 가꾸시느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그런데 할아버지는 땅만 보고 농사를 짓느라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도 고개를 들지 않더라. 땅에 한 뼘 자리가 없는 것처럼, 할아버지 마음에도 이웃의 인사가 들어갈 빈 구석이 없나 봐.


그래서일까, 난 할아버지 밭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며 자꾸 다른 장면들이 연상되곤 해. 이를테면 케이지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닭들, 너무나 촘촘히 붙어 앉아야 했던 내 국민학교 시절의 교실, 사람으로 멀미가 나던 출퇴근 시간 신도림역 역사 같은 것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도 빽빽하게 채우며 살아. 옷장 서랍은 꾹 눌러도 빠져나올 만큼 많은 옷들이 들어 있고, 냉장고와 냉동실에도 사다 놓은 음식들이 가득 차 있지. 휴대폰은 배터리가 100퍼센트 가깝게 충전되어 있어야 불안하지 않고, 타고 다니던 자동차의 연료도 절반 아래로 떨어지지 않아야 마음이 놓이니까.


그런 불안한 마음에는 바람이 통하지 않지. 빈 구석이 없으니까. 가득 차지 않아도 괜찮아,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아, 좀 비워져 있어도 괜찮아, 그런 것들을 배웠어야 했나 봐. 씨앗을 너무 많이 뿌려서 솎아내기가 어려웠던 내 작은 텃밭처럼 내 삶에서도 솎아내야 할 것들을 잘 솎았어야 했나 봐, 작은 것들이 세상을 채워가는 소만 절기에는.

볼품없는 내 밭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고 있어. 수고하라고 양손 엄지척을 해주는 얼치기 농부의 장갑도 있고!
오늘의 수확물. 농장주가 허락한 딸기도 몇 개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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