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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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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Jan 06. 2024

MBTI가 필요한 부부

다름을 이해하고 얻은 위로

아내가 끙끙 앓았다. 체온을 재보니 열이 많이 나고 있었다. 상비약을 챙겨주고 전기장판을 준비했다. 하필 주말이라서 몸이 스스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가 곁에서 함께 잠들고 말았다. 하루가 지나고 다행히 열은 내렸다. 아내는 침대에 누운 채 하루 사이 핼쑥해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내가 아파도 별로 걱정이 안 되지?


웃으며 말했지만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속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나는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상비약과 전기장판을 챙겨주었고, 무엇보다 당신의 건강을 염려하며 곁에 있었는데 걱정을 하지 않다니. 하지만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십여 년을 함께 하면서 (무엇이 서운한 지 나는 모르지만) 아내가 서운함을 에둘러 표현하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웃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이제 좀 살만 해졌나 보다.






그날의 대화가 우리 사이에 다시 등장한 것은 MBTI 덕분이었다. 코로나가 터졌던 2020년의 어느 날, 우연히 MBTI를 가르쳐주는 유튜브 심리학 채널의 영상을 본 아내는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앞뒤 맥락을 생략하고 질문했다. 자기가 교통사고 났다고 연락 오면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할 거냐고. 당연히 다친 데가 없느냐고 묻겠지 하고 대답하자, 아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빠는 F인가 보다. 나는 보험이나 병원부터 확인할 것 같은데. 그러면서 자기는 T인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친김에 인터넷에서 약식으로 MBTI 검사를 해보았고, 검사 결과에 우리는 큰 감명을 받았다.


설명할  없었던 지난날의 서운함이 어디서  것인지 이해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도와주어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것이라 느낀다는 자신의 성격 유형에 아내는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그러니까 그날처럼 배우자가 열이 펄펄 끓었다면 본인은 주말에 여는 병원을 찾아보거나 응급실로 데려갔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반면에 나의 성격유형은 문제 해결보다 감정이입이 먼저다. 많이 답답했을 테다. 자기와 달리 문제 상황을 손 놓고 바라만 보는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다름을 확인한 우리는 오히려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해가 주는 위로가 있다.  


사람들이 MBTI를 재미있어하는 이유 중 하나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순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너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구나. 하고 차이를 품으면 그간의 서운함도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제대로 위로를 받은 내용은 따로 있었다. 남편의 성격은 열여섯 가지 유형 중 가장 난해하며,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자기도 자신을 모르겠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는 설명. (그래서 철학자나 심리학자 혹은 성직자가 어울린다고 쓰여 있었다.) 게다가 가까운 사람도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잘 모르겠다고 느껴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고도 적혀 있었다. 아내는 이 부분을 읽고는 소리를 질렀다.  


바로 이거라고!




오브라이언만이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인간은 사랑받기보다 이해받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미칠 지경에 이를 정도로 고통을 가하고 나중에는 틀림없이 사형장으로 보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둘은 어떤 의미에서 친구보다 더 깊은 관계다.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인간은 사랑받기보다 이해받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사랑하는 여자 줄리아보다 정적인 오브라이언이 자신을 더 잘 이해한다고 느끼는 순간을 경험한다. 정적일지언정 서로의 다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상대에게서 깊은 위로를 받은 것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연인, 가족, 친구에게 이해를 받으면 어떻겠는가. 이해는 때로 사랑보다 간절해진다.  


MBTI에 과몰입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타인에게 강한 선입견을 가질 수 있고, 자기 자신도 틀에 가두며 변화의 가능성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격을 열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는 것에 순기능이 더러 있다면, 그중 하나는 서로에 대한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위로를 받고, 서로에게 관대해지고,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갈 가능성의 싹을 틔울 수 있다.  





언젠가 집에서 함께 밥을 먹은 뒤,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가 손가락 끝을 베었다. 얼른 휴지로 지혈을 하는 동안, 악 소리를 들은 아내가 달려왔다. 그리고 피로 흥건하게 젖은 휴지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앞으로 고무장갑을 꼭 끼고 설거지해.
아니. 나 다쳤다고! 여보. T야? 아. T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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