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거리의 습한 공기를 따라 남자와 여자는 천천히 떠내려 가 듯이 걸음을 옮겼다. 보도블럭들이 저녁 무렵부터 얕게 내린 부슬비에 젖어 가로등 불빛을 은은하게 머금고, 가로수들의 잎들이 노랗게 반짝였다. 그 사이로 두 사람의 말소리가 오가며 발자욱 소리가 차분히 뒤따르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이따금 가로수에 맺힌 빗물이 남자가 들고 있는 큼직한 우산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조금 전 남자의 지인들과 술자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제 그만 할 말을 해보세요.” 갑자기 남자가 화제를 돌렸다.
“무슨 말?” 모른 척 여자가 되물었다.
“할 말이 있으니까.” 당연하듯 남자가 답했다.
여자나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부터 계속 신호를 주잖아요. 바보가 아니면 모를 수가 없어요.”
“큭.” 여자의 웃음이 잔잔하던 공기를 울렸다.
“자 그러니까 이제 말을 해보세요.” 남자는 몇 걸음을 옮기는 동안 가만히 여자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여자가 선언하듯 말했다. “나도 이제 반말할래요.”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남자의 눈썹이 떠올라 멈춰 섰다.
잠시 생각하던 남자가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아무렇지 않게, 그냥?” 여자가 남자를 올려보았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가끔씩 반존대하잖아요.”
“그거야 반말이라기 보단 맥락상 말줄임에 가까운 거죠. 말이란 게 그렇잖아요. 너무 곧이곧대로 표현하면 딱딱해지니까. 여자는 말투에 민감하다구요.” 여자는 말하면서도 왜 자신이 해명하고 있는 거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 그보단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해요. 혹시 불편했어요? 그래 보였던 거 같진 않았는데.” 남자가 고개를 숙여 여자를 살펴보았다.
여자가 멈칫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전혀 아니에요. 불편한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근데요?”
“그게.... 좀.” 여자가 부끄러운 듯 눈을 피했다. “질투가 나서요.”
“질투?” 남자의 걸음이 멈춰졌다. “점점 더 예측불가능한 지점으로 달려가는데요.”
다시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정말 별거 아니에요. 그냥 조금 전 갑자기 떠오른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남자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여자가 쑥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까 선배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걸 보구요.” 두 사람은 조금 전 남자의 지인들과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는 길이었다.
“아...” 남자가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어떤 기분인지 알 거 같아요. 혼자만 존댓말 하고 있었으니 소외감 같은 게 들었겠네요.”
“소외감이라기 보단.... 예전에 은성 씨랑은 밥을 먹었으니까.”
“근데요?”
“그... 언니랑 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우리 존댓말이 불편한 건 아닌데, 그 언니랑 하는 격 없는 말들에 약간 질투 같은 게 났어요.” 여자가 스스로에게 확인하듯이 다시 한번 말했다. “맞아요 그건 질투심이었어요.”
뜻밖의 표정을 하고서 남자가 말했다. “누나일 뿐인걸요. 주희 누나는 그냥 꼬마 때부터...” 가만히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여자를 보고서 그가 하려던 말을 멈췄다. 그는 말을 고쳐 차분히 말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그럼 우리 지금부터 서로 말을 놓기로 해요.”
“정말 그래도 돼요. 어색하지 않겠어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그 정도는 어색할 게 없는 사이 아니에요?” 남자가 빙긋 웃었다. “난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었는데요.”
“그냥.... 말 놓는 걸 못 봐서요. 생각해 보면 그때 은성 씨랑도 반말했을 텐데, 오늘 갑자기 깨달아서요. 다른 여자랑은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구나....”
“동네누나랑 서로 존대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죠.” 여자가 잦아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데 또 혹시라도.... 이상할 건 없지만 자신만의 이유나 신념 같은 게 있을 수 있으니까.”
남자가 삐죽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런 건 없어요.” 마침 지나가던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후두둑- 빗물이 우산을 때렸다. 그가 우산을 반대손으로 옮겨 잡으며 여자의 등을 살짝 밀어 걸음을 옮겼다. “왜 말을 쉽게 놓지 못하는 걸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요. 또 그래서 쉽게 친해지기 힘들다는 말도 듣긴 했어요. 근데.”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감싸 당겨 꺼진 보도블럭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피하게 했다. 그녀는 이야기에 신경쓰느라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이 때문에 누구는 말을 놓고 누구는 높이고 하는 게 좀 권위적이라 느껴서 내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성향인 거죠.”
“맞아요. 선배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해요. 뭔가 사적인 거리가 분명하달까.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선이 있다니까요.”
남자가 말했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죠. 우릴 봐요. 얼마나 쉽게 친해졌어요.” 그의 한쪽 검지손가락이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켰다.
“네?” 여자 눈이 동그래지며 걸음이 멈춰졌다. “세상에....”
앞서 한 발짝 내딛던 남자의 걸음이 되돌려졌다. “뭐지, 이 부정적인 반응은”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겠어요.”
“여기엔 다소 견해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난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까 준비되면 말하세요.” 남자가 유쾌한 말투로 여자의 등을 토닥거렸다.
“하여간 말은...” 여자가 남자의 손에 떠밀려 다시 걸음을 옮겨갔다.
“그럼 우리 지금부터 말을 놓을까요?”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둠 속으로 퍼지듯이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가 올려보며 새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선배부터 해봐요.”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여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게 생각에 잠긴 남자의 버릇이란 걸 알면서도 이럴 때 그녀의 가슴은 속절없이 뛰었다. 갑자기 그가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이진이 안녕. 너 참 예쁘다.” 남자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