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21607.m4a]

2025. 8. 6. 특정 인물 지정하기

by 글러먹은

아이고, 정말 오랜만입니다. 간만에 얼굴 뵙네요. 일단 날도 더운데 주문부터 하시죠.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 건데 뭐 드시겠어요? 진동벨 울리면 제가 가져올게요. 자리부터 잡자고요.


잘 지내셨죠? 아니, 갑자기 전화해서 다짜고짜 만나자고 해서 놀랐잖아요. 큰 일 있는 줄 알고.


예? 인터뷰요? 대상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제가 뭔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아, 잠시만요. 진동벨 울리네요.


가만 보자.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 커피 한 잔 가볍게 마시러 나왔다가 이렇게 깊은 사색을 요구하다니. 제가 특별히 인심 썼습니다.


흔히들 사람의 생각이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과거는 흘려버리고 미래는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데 요새 가끔 옛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친구가 떠올라요. 흠, 이니셜로 J라 부를게요.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J랑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첫 만남이 진짜 웃겼어요. 요새야 네이버 블로그가 광고투성이지만 그때는 파워블로그도 막 도입되고 나름 유행이었거든요? 저도 열심히 블로그도 꾸미고 글도 쓰고 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심심해서 검색어로 학교 이름을 쳤는데 J의 블로그가 나오더라고요.


1학년 13반으로 배정되었다고 기대된다고 쓴 글이었는데 마침 저도 13반이었어요. 같은 반 사람을 블로그에서 만나다니. 그리고 바로 이웃 신청했을 거예요.


왜냐고요? 친해지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전 우연히 글을 발견한 것도 그때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무튼 둘 다 블로그에 개인 사진은 한 장도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은 모르지만 이름만은 외우고 학교를 갔죠.


요새 MBTI가 유행이잖아요. 그때 우리는 분명 극 I였어요. 첫날부터 아는 척하며 호들갑을 떨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일주일 동안 서로 눈치만 봤어요. 쟤가 그 블로그의 걔구나! 걔가 쟤구나!


아, 혹시 해서 말하는 건데 J는 여자예요. 우리 학교는 1학년부터 분반이거든요. 남자라 생각하고 두근거렸다면 아쉽.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원어민 영어 수업 때 드디어 말을 했어요. 이동 수업이다 보니 자리가 뒤섞이면서 제 앞에 앉았거든요. 흠, 제 기억으로 아마 J가 먼저 말을 꺼낸 것 같아요.


“너, 혹시 블로그, 맞지?”

“응, 너도 맞지?”


그제야 말문이 터졌어요.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는지. 가뜩이나 학기 초라 서로 친해져야 한다고 교실 뒤편 게시판에 자기소개 프로필 같은 것을 써서 붙였거든요? 그게 또 친구에 대한 환상을 더 부추겼을 거예요.


J는 이 가수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누구를 좋아하는데! 얘는 어쩜 삼겹살이 좋다는 걸 남의 살을 굽는다고 표현을 할 수 있지? 대단해! 이런 상태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아무튼 J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독특했어요.

타짜 명대사 좀 따라 해 봤는데 그럴싸했나요?


가슴에 손을 얹고 단연코 말할 수 있습니다. J는 특이했어요. 남의 살을 좋아하는 그녀는 일단 문학소녀였습니다.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도 상을 받았으니, 실력조차 갖추었고요. 그래서 J가 추천하는 책은 꼭 따라 읽으려고 했어요.


대런섄 시리즈라고 아세요? 공포 판타지 소설인데 괴물 서커스, 뱀파이어 뭐 이런 기기괴괴한 것들이 나와요. 재밌게 읽었죠. 아마 제 취향의 일정 부분은 이때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해요.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 자주 가던 J. 그래서 그런지 취향도 확고했고, 표현력도 남달랐어요. 본인을 항상 천재라 칭했으니까요.


“그런데 네가 왜 천재야?”

“나는 내가 천재인 걸 의심해 본 적 없어.”


반박이 무의미해요. 내 이름이 ○○○인 것처럼 걔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참고로 J는 AB형이에요.


나 때는 말이에요. 그래요. ‘라떼’는 말이야. 혈액형이 MBTI를 대신했는데 AB형은 4차원으로 유명했어요. 말이 좋아 4차원이지 사실은 또라이. 아시죠?


우리 둘 다 서로의 베스트 프렌드, 단짝 친구는 아니었지만, 꽤 친했어요. 아니, 많이 친했어요. 고등학교 때, 특히 1학년 때 친구가 오래 간다잖아요? 그 말을 믿었죠.


예, 믿었어요. 대학교에 가서도 우리는 자주 만났으니까요. 좋아하는 외국 배우가 새 영화를 찍으면 개봉되자마자 바로 가서 보고. 그 구리 백화점 뒤편에 공원 있는 거 아시려나. 거기에서 맥주를 몇 개나 까먹었는지. 영화의 노래가 좋았다, 별로다, 좋으면 이 영화도 추천한다, 나도 봤다, 너도 봤냐.


뭐, 그립죠. 지금은 다들 바쁘고. 서로 각자 살기 힘드니.


연락 안 하냐고요? 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이유는 노코멘트할게요. 머리 큰 지금이야 그때는 왜 그랬을까. 내가 용기 내서 먼저 연락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죠.


무슨 영화였더라. 기억이 잘 안 나네. 그 영화 중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추억은 가슴에 묻고 지나간 버스는 미련을 버리라고. 아직도 구리에 산다고 알고 있는데 지나가다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넉살 좋게 잘 지내니 하고 붙잡아 물어보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냥 잘 살고 있네, 하며 지나가겠죠. 예전에는 엄청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러려니 해요.


누구나 맘속에 그런 사람 한두 명 정도 있잖아요?


오랜만에 추억 여행했네요. 아무한테도 말해 본 적 없는데. J도 모를걸요? 어머, 부끄럽게 본인 앞에서 어떻게 말해요.


인터뷰는 이게 끝? 그보다 이제 배고프지 않아요? 벌써 7시인데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죠.

작가의 이전글추석탈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