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지루하다. 러닝타임 내내 별 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일상 이면에 일어나는 소용돌이 같은 심리상태는 철저하게 숨겨지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암호의 해석은 상당히 힘겹다. 이 영화에 나오는 두 주연의 관계가 아버지와 어린 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어린 딸은 성장하느라, 낯선 세상과 만나고 소통하느라 바쁘다.
엄마랑 사는 딸 소피와 모처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젊은 아빠 칼럼은 터키에서의 여름휴가를 계획한다.
터키의 낮은 쨍하고 밤은 쾌청하고 사람들은 적당히 서로와 어울린다.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슷하게 나른한 휴식의 연속이 이어진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날들이 이어진다.
화려한 볼거리, 끝내주는 긴장감, 부녀의 목숨을 건 결투? 복수? 없다.
... 뭐, 재혼의 가능성? (페어런트 트랩?)
그것도 아니면 살인???
없다.
결정적인 순간, 드라마틱한 등장과 퇴장... 그런 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지루하다.
카메라는 그냥 랜덤 한 순간들을 담는다. 휴가지에서 카메라를 잡은 아이가 찍은 사진과 영상의 모음처럼 개연성 없고 반짝이지만 평화롭고 별 거 아닌 순간들의 연속이 이어진다. 일반적인 영화처럼 갈등의 해소, 뚜렷한 기승전결, 긴장감과 해소가 없다. 아주 작은 단위에 카메라가 집중하고 그래서 템포는 심장박동처럼 느려진다. 우리는 며칠 동안의 휴가를 사건이 아니라 심장 박동 수준으로 작게 쪼개서 보게 된다.
매우 고요한 공간에서 내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우리는 새삼스러운 발견을 한다. 심장이 바쁘게 일을 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분명, 감독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작고 사소한 것에 집중시켰다.
왜 이런 방법을 취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보통 기억이, 그리고 영상이 그렇게 점점이 이어진 것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년시절의 기억은 조각조각 나기 쉽다. 듬성듬성 구멍 난 기억을 기우는 것은 사진과 영상 증거들이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이루게 되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의 단서들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고, 가까이서 혹은 그 당시엔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첫 키스를 휴가지에서 만난 남자아이와 한 소피가 성인이 돼서는 동성연인과 살고 있는 것도 점점이 흩뿌려진 신호와 눈빛가 켜켜이 결과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성인이 된 소피가 그때의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서이다.
영화 끝에서야 드러나지만 이 영화는 성인이 된 소피가 그 당시를 회고하는 기억의 모음집이다. 어렸던 소피는 그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고 차마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인 칼럼은 깊은 우울에 잠겨 있었다. 아주 작은 단위로 세심하게 봐야 만 보호자인 어른이 성실히 숨기고자 한 우울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소피는 작게 느리게 조각난 것을 기워보는 것이다.
칼럼의 우울은 칼럼을 아래로 가라앉히고 무너뜨리고 떨어뜨리고 잠기게 한다.
엄마에게서 떠나온 여기 휴가지에서만큼은 유일한 보호자이기 때문에 칼럼은 소피에게 든든한 아버지가 되고자 한다. 칼럼은 소피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든 상의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정작 자신은 소피에게 상황을 털어놓을 수 없다. 물론 어린 소피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소피는 존재만으로 칼럼에겐 대단한 동력이다. 소피만이 위태로운 칼럼을 겨우 서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책임감으로 감긴 소통의 불능과 가장 사랑하는 타인에게도 닿을 수 없는 마음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비릿하게 아파온다.
칼럼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위태롭다.
소피가 조금이라도 한 눈을 팔면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잠수경처럼 잠겨버린다. 발코니에서 추락할 것처럼 위태롭게 서있고, 깁스를 혼자 힘으로 풀어내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쓸쓸하다. 소피는 스러지는 아빠와 함께 차라리 창공을 날고 싶다. 하지만 칼럼은 그러기엔 소피가 너무 어리다고 말한다.
그때의 소피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를 도울 수 없었다. 지금의 소피가 그때의 아버지를 돌아보는 이유는 지금의 소피도 아버지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기억 속에 살아있고 갇혀있다. 소피는 간절하게 다시 영상을 돌려본다. 이제 어른이 된 눈으로 아버지를 보고 사랑하고 알고 싶어서.
그 염원이 읽히는 순간 이 영화는 더 이상 지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