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감이 좀 있긴 했지만 12/8일 스태프 브리핑을 끝으로 거의 연말 휴가 분위기다. 다음 주부터는 휴가 쓰고 안 나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번 주에 한국으로 치면 종무식 같은 것을 했다. 연말이라 선물을 나눠주는데 와인을 골라 갈 수 있어서 이거 가지러 (사람도 어차피 많이 없겠다) 오래간만에 잠깐 회사 리셉션에 들러볼까 싶다. 귀차니즘이 생기면 또 안 가겠지만 술을 잘 못 마시기 때문에 와인을 거의 음식 만들 때 쓴다. 크리스마스 계획도 어그러졌고, 연말 계획도 딱히 있는게 아니라서 남편과 연차를 맞추기 위해 휴가를 더 쓰는 대신 연차 5개를 내년으로 미루어 놓고, 업무 중 틈틈이 하고 있던 Digital technology innovation과 관련된 강의를 듣기로 했다. 이렇게 회사일도 마무리가 되었고, 그 와중에 6개월여간의 Probation을 무사히 마쳤고, 다행히 그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에서 좋은 피드백을 받아 결과론적으론 무던하지 않았나 싶다. 과정적으로는 모든 그렇듯 짜증 나고 xx 같은 상황이 항상 있었지만 예전과 다르게 올해 즈음부터는 초연하게 (그러려니~), 감정에 말리지 않고 일을 하게 된 것 같아 스스로의 변화가 좀 신기하다고 느꼈다. 그 연장으로 의도하진 않았지만 좋은 기회들도 종종 얻게 된 것 같아 커리어적으로는 의미가 있던 해였다.
개인의 경험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아주 제한 적이었다. 2년째 계획만 하고 있는 몰디브 풀빌라와 올란도 디즈니 월드는 눈팅만 하고 있다. 제발 내년엔 티켓팅을 하고 싶다! 2020년과 2021년은 너무 비슷하기도 하고 시계가 섞여서 언제 뭘 했는지도 헷갈린다. 이를테면 내가 올해 리버풀을 올해 갔나 안 갔나 이런게 헷갈려서 블로그를 뒤적거린다. 영국 밖으로 못 나간 것이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외국에 살고 있고 이 시국에 거창한 ‘여행’까지는 아니지만 차 타고 아무 곳이나 네비 찍고 간다면 웬간하면 태어나서 처음 가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제법 여행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근 이 년 동안 세상에 대한 경험과 영감을 받을 만한 것이 제한적이었지만, 그 덕에 새롭게 운동을 시작했고, 시기가 시기인지라 면역에 좋은 건강한 음식(유기농과 슈퍼푸드를 의식적으로 찾는다던가)을 더 자주 해먹으며 한 해 동안 단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툭하면 자주 아팠기 때문에 이것도 큰 성취라 생각했다. 어떻게 몸을 관리해야 하는지 신체 자본에 대한 인지와 몸의 컨디션을 스스로 파악해서 일정하게 유지해야 좋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던 한 해였다.
경제적으로는 남편과 나 모두 이직을 하며 연봉도 올랐고 신변의 변화가 생기며 집도 구매하게 되었는데, 금전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안정감이랄까 그런게 생겨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둘 다 초반에 영국 회사에 적응하느라 약간의 어려움은 좀 있었지만, 거의 10년 전 사회 초년생 때의 우리와 비교하자면 느리긴 하지만 한 단계씩 삶의 질이 올라간다는 것, 향유하는 문화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한국 부동산만 생각하면 여전히 현타가 좀 오긴 하지만... 결국 부 라는 것은 맹목적으로 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씀으로써 rich가 아니라 wealthy라는 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라던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wealthy라는 형용사에 대한 느낌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 직간접적으로 느껴본 해가 아니었나 싶다.
마무리를 해보자면 그럭저럭 우리는 무던하게 잘 먹고 잘 살았고, 스스로 성장한 느낌이 들었고, 주변도 무탈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신이 빠졌는지 보통 3-4월에 하던 기부금 내는 것은 까먹었다 (역시 한 해를 되돌아보니 기억이 난다). 올해는 푸드뱅크에 음식을 사다가 넣는 것으로 따뜻하게 연말을 보냈다.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은 새해 계획을 세울 때, 목표를 거창하게 주르륵 나열하는 것보다 단어 하나로 딱 정리해서 그 단어가 몸과 마음에 체득되도록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친절'이라면 이 단어가 내가 하는 일에 속속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다. 2021년 남은 기간 동안은 내가 내년에 몸과 마음속에 새겨야 할 단어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고민해 보는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