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이 사회생활 10년째 되는 해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ㅠ (토닥). 출근하던 첫날, 이걸 어떻게 평생 하지 싶었는데 눈 깜짝하는 사이 10년이 지났다. 그래서 10년이 지난 지금, 직장 생활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리고 당분간은 현직에 있을 테니, 까먹기 전에 동양과 서양의 대기업을 모두 경험해 본 후기(?)를 써볼까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공부를 애매하게 했다. 아주 특출났으면 누구처럼 의사나 약사 같은 전문직을 했을 테지만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이미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깨달았고, 내가 못하는 것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는 스타일이라 다른 길을 얼른 모색했다. 이걸 어릴 때 깨달았으면 좀 나았으려나 싶기도 한데, 어쨌든 줄 세우기 경쟁에서 탑티어가 아니니 종착지(?)가 대기업이다. 공부를 애매하게 잘하면 하게 된다는 바로 그 회사원이 된 것이다.
요즘 구직자들이 가고 싶어 하는 한국의 회사하면 네카쿠라배? 핫한 기업들이 있더만, 나는 10년 전 입사했으니 아주 전통적인 대기업 울타리 안에서 전형적으로 말 잘 듣고, 열정은 조금 있고, 자기계발 열심히 하는 사원으로 그냥저냥 다녔다. 임원이 돼야겠다는 허황된(?) 마음이 애초에 없던 것이, 새벽 6시에 영어 공부한다고 출근하는 임원들을 보니 너무 피곤해 보였고, 임원이 뭐 내 마음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운이 많이 좌지 우지 하는데 젊은 나이에 내 운명을 벌써 운에 맡길 수는 없었다.
모그룹을 빼면 내가 속했던 계열사 임직원은 대략 7천 명 정도였고 (지금은 5천), 글로벌 ENR firm 랭킹 기준을 보자면 80위권 이내로 중동이랑 동남아시아 위주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복지를 언급하자면 경조사 때의 혜택이 크다고 느꼈고, 회사 식당 밥, 통근버스, 임직원몰 할인, 사내 유치원, 학자금, 건강검진 정도 기억이 난다. 자꾸 글로벌을 강조하는 반면 조직의 상하 관계가 아주 치밀하고 촘촘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답답했다. 계약직 비율이 꽤 높은 편이었는데 보통 정규직 직원에 비해 처우가 안 좋고, 월급이 낮고, 고용안정이 떨어지고, 사내에 은근 보이지 않는 차별과 동정이 있었다. 기수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선후배 관계가 촘촘했고, 경력직인 경우 성골이 아니라고 뒤에서 배척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연봉의 경우 초봉은 한국의 신입사원 기준으로 하자면 상당히 높은 축이었으나, 그 이후 연봉 상승률이 생각보다 낮아서 과장/부장님 연봉을 들었을 때 (숫자가 특이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대로 20년 다니면 큰일 나겠다 생각이 바로 들었다. 성과급이 연봉에 영향을 많이 주는데, 이게 안 나오면 꽤 타격이 컸다. 오가고 나가는 사람이 계약직을 제외하면 적은 편이기 때문에, 내부 파벌싸움에 말리거나 고인물이 되기 쉽고, 사내 전용 시스템을 사용하기 때문에 회사를 나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될 수 있다 (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회사 상황이 항상 어렵다, 위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위기의식(?) 같은 것이 자연스레 스며든다. 위기경영, 책임의식, 고통 분배와 같이 함께 힘든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내부에 짙게 깔린 분위기다. 업무를 말하자면 위에서 모든 책임을 지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소소한 경우가 많으며, 대신 책임감도 적어서 일적인 부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적다. 스스로 역량이 늘어난다는 것보다는 회사의 업적, 팀이 성취하는 데에 내가 이바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모그룹을 빼고 내가 속한 계열사는 임직원이 약 2300여명 되고, 글로벌 ENR 랭킹 기준 20위권 내에 있다. 마켓은 중동,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가 대부분이고 동아시아는 돈이 적다보니 관심이 없다. 연차는 복지가 아니니 그 외 복지를 언급하자면 개인 보험, 연금 지원, 사설 의료 지원, 외부 쇼핑 할인 정도. 복지 측면에선 한국 회사가 압도적이라 크게 복지가 좋다는 것은 못 느꼈다. 여기도 조직구조가 뚜렷하게 있으나 한국처럼 촘촘하진 않다. 한국의 결재라인까지 6단계라면 여긴 한 3단계 정도 된다. 계약직은 비율이 상당히 높고, 연봉도 더 높고, 사람이 부족한 산업이라 그런지 피고용자가 갑같은 을의 느낌이다. 그 관점에서, 고용 안전성보다는 안 내키면 언제든 그만 둘 수 있고, 여차하면 다른 데로 옮겨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스탠스다. 사람들이 국적이 다양할뿐더러, 기수도 없고, 학연이고 지연이고 적용이 아예 안되기 때문에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라던가 정이라던가 챙겨주는 그런건 확실히 없다. 각자도생이다. 너무 원하면 자기랑 마음 맞는 사람이나 취미가 비슷한 사람끼리 따로 연락하고 그룹 만들어 어울리면 된다. 신입 초봉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보다 낮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자기 경험치 (플젝같은) 쌓아서 이직을 하던 진급을 해야 연봉을 올릴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마찬가지로 연봉 상승률이 크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회사 내부던 밖이던 어필을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직급 이상이 되면 이곳도 정치질을 하지만 한국처럼 정도가 심하진 않다 (이건 인간의 본성인가). 오가고 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시스템 자체가 유연하고 제너럴 해서 금방 다른 회사에 가도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이직이 잦은가 싶다. 유연하다는 것만 다르고 전체적인 시스템 틀은 한국의 대기업과 아주 흡사하다. 아마 이곳 기업이 더 오래되었으니, 한국이 표방했으려나?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한 것을 들어 본 적이 없고 항상 회사 상황이 좋다고 하는데, 위기의식에 세뇌된 사람으로서 이건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상황이 좋으니 더 잘 되기 위해서 협력하고 화합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자가 전체적인 분위기다. 업무에 대해 말하자면, 각 레벨에 맞게 자기가 주도적으로 리딩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다. 일이 잘못되면 내잘못이 바로 보이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며 일하지만 대신 스스로 역량이 생긴다는 느낌도 많이 받는다. 회사의 성취보다는 이걸 잘 수행하면 내 CV에 좋은 것이니 더 해보려는 의지가 생긴다.
요즘 들어 느끼는 것은 어디가 압도적으로 좋고 안 좋고 가 아니라 각 나라, 기업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그냥 자기한테 맞는 곳/커리어에 부합하는 곳에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한 현실에 불만이 생길 때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나는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돈만 버는 수단으로써만 생각하면 고되지만, 여러 경험을 통한 내 역량을 키우기 위한 밑거름이라 생각하면 나름 할만하다는 것이 영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느낀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랄까…영화배우가 필모그래피를 쌓듯이 나도 여러 프로젝트를 시도해가며 경력을 쌓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10년 뒤에 뭐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뭐 일단 열심히 일은 해 본다.